나는 누구이오며
나는 누구이오며 (역대상 17:16)
작년에는 6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노화 또는 노쇠라는 심각한 변수로 인해 발생하는 삶의 변화를 자가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올해, 70대에 들어서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이번에는 70년 내 삶의 전체를 자가점검해 보려 한다.
나는 살아온 시간의 뒤를 돌아볼 때마다, 후회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70살이 다 되어서 뒤돌아보니 아니다. 후회되는 것이 참 많다. 특히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의 용감한 삶과 비교해 볼 때, 장애에 대하여 용감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제일 후회된다. 너무 움츠러든 모습으로 소극적 반항만 하다가 아무 일도 적극적으로 감당해내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대처하곤 했던 것을 후회한다. 삶에 대하여 용감하지 못했던 것, 당당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장애에 모든 핑계를 댔던 것을 후회한다.
나는 장애라는 벽 하나를 뛰어넘지 못해 지금까지 억눌려 살았다. 인생에서는 장애만큼 높은 벽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데, 그런 벽을 만날 때마다 장애를 핑계 대며 더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 행복하게, 더 당당하게, 더 높이, 더 멀리 뛸 수 있었는데, 사방팔방에 시선을 두고 뱅글뱅글 돌다가 그 자리에 서서 자족하겠다고 나를 세뇌하곤 했다. 막히면 뒤돌아서고 막히면 뒤돌아서느라고 에너지와 시간을 다 소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습관을 여전히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연속되고 있는 이러한 패턴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단순한 원리는 안다.
지금까지는 계획 밖에 발생한 사건은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이제는 용감하게 대면하려는 방향으로 나가야만 한다. 장애라는 핑계 거리를 벗어나기로 다짐했으니 이제라도 나의 정체성을 다시 바로 세우고 남은 삶을 좀 더 나은 삶으로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다짐이 정착하기도 전에 또다시 불안한 질문으로 흔들린다. 과연 70대가 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또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가 아니고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인데, 70년을 살았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70년을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하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6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진정한 나로 살겠다고 ‘나로 살기’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예수쟁이로 그리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나를 자리매김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난 아직 ‘나로 살기’의 ‘나로’가 불분명한 상태다. 확신이 없다. 다시 묻는다. ‘나로 살기’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진정한 나로 살기 즉 예수 믿는 사람으로 그리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꿈꿔왔는데, 과연 나는 진정한 나로 살기를 하고 있는가를 다시 점검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다시 묻는다. 70대에 들어선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규정되어 있는가? 여전히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최근에 나는 작은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 유형무형의 짐을 버리고 있다. 경제 상황을 점검하면서 보험들을 해지했으며,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있으며, 자질구레한 짐들은 물론 책이나 갖가지 자료들까지 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 일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일기까지 다 버리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종료되는 것일까. 거기에 묻어있는 추억까지 버린다면 ‘과연 나 자신으로 남는 것인가, 그렇다면 끝까지 남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자 했던 삶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살아가고자 했던 삶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내 삶이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줄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개미 무리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는 개미처럼 말이다. 모두가 가는 길에서 벗어난 개미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나 역시 무리에서 떨어진 개미처럼 모두가 가는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삶은 남은 노년의 삶을 또 어떻게 조정할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다. 너무 불안해서 미래를 그려볼 수 없다. 예측할 수가 없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엘리야(열왕상 19:4)와 요나(요나 4:3,8)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삶에 대한 불안에서 삶에 대한 권태가 생겨난다고 해석했다. 내가 70대에 이르러 ‘내가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 역시 불안에서 비롯된 권태로부터 나온 질문이 아닌가 의심해본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미래가 불안하다. 이렇게 불안에 잠식되어 있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