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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se Rinser] 왜 사느냐고 묻거든

truehjh 2024. 8. 25. 13:34

왜 사느냐고 묻거든(모순과의 결혼) / 루이제 린저

(1977 11)

 

- 어떤 의견에도 나를 묶어 고집하지 않습니다.

 

- 물리학의 모든 석학들은 현재 옳다고 인정되는 것은 바로 지금 한순간동안 옳은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사실을 향한 한낱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 중의 어느 누국도 그런 이유로 해서 자신의 작업이 시지프스와 같은 보람 없는 수고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 한번에 결정적으로 찾아지는 것보다는 모색하는 과정이 한결 소중하다는 것을 누구나가 압니다.

 

- 자살이라는 것은 일단 고려의 범위에 들어오면 실천될 수 없는 성품의 것이니까요.

 

- 이런 실질적인 질투를 극복하기란 우리 모두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생의 근원 현상에 속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여기에 속하는 전설이겠지요. 카인은 동생 아벨에 대해 자기 자신의 방식과 전혀 달랐던 그의 존재 방식, 제사의 방식과 하다못해 번제에서 올라오는 연기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전혀 달랐던 존재 방식에 대해 질투를 했습니다. 카인은 거기서 아벨이 훨씬 하나님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즉 아벨의 존재 방식이 옳바른 것임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될 것이라고 추리를 해 내었지요. 이를테면 카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특성에 대한 심판의 존재로 체현된 동생을 생의 위협으로 견디지 않아도 되도록 동생을 때려 죽였던 것입니다. 달리 존재한다는 것이 전혀 자신의 탓도 아니고 또 자기편에선 카인이 달리 존재한다 해서 전혀 위협으로 느끼고 있지 않았던 무고한 아벨을 말이지요.

 

- 우리는 영원히 완전무결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보다 훨씬 푹이 큰 일이 가능하다. 곧 사랑하는 일이다.

 

- 너는 네가 이해하고 있는 신과 닮았구나.(괴테의 파우스트 중)

 

- 첫사랑의 편지나 말린 꽃잎을 간직하고 있듯이 또 어떤 이는 할머니의 기도서에 대해 경건한 애착을 갖고 잇듯이, 현대를 사는 청년 당신은 한 시대를 (시트라우스, 포이어, 바하, 마르크스, 니이체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무신론에 끈질긴 애착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 사라져 버린 표상을 지닌 단어는 무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이 곧 표상된 사물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 옛날 인류가 지구가 편편한 원반이라고 표상했다고 해서 결코 실제의 지구가 한 조각의 원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을 사부의 권위로 표상했다고 해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을 어떤 인격이라고 표상하는 경우 우리는 인격이라는 개념 역시 가변적이라는 것을 고려에 넣지 않고 인격에 대한 본질적 정의를 신에 대한 표상에다 떠맡겨 버린 셈이 되겠지요.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표상에서 표상으로 옮아 왔을 뿐 진실에서 진실로 옮아 온 것은 아닙니다.

 

- 신을 초월한 존재여야 신을 이해할 수 있다.

 

- 당신에게 사랑의 실존을 명시해 주는 것은 어떤 여인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실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느끼는 산 체험, 확신을 갖고 그것이 사랑임을 자각하는 산 체험뿐입니다.

 

- 최고의 행위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무행위는 지나친 속력으로 돌아가는 바위가 그토록 집약적인 운동을 하는데도 정지해 있는 원반처럼 보이듯이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듯 겉 보이는 일종의 엄연한 행위입니다.

 

- 오늘날에 와서 신의 특성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우리에게 거짓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신의 존재에 대한 한층 발전된 표상이 우리 앞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 궁극적으로 언어, 곧 말의 문제입니다. 특정한 표상에 관해 우리가 가진 것은 언어뿐이니까요. 새로운 표상이 등장하면 낡은 언어들은 의미들이 맞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낡은 언어가 사라지면 마치 그 언어로 특정 지워졌던 사물도 죽어버린 것처럼 착각되는 짧은 기간이 종종 있기 마련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형이상학자뿐 아니라 물리학자들까지 이런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 과연 금욕은 의욕과 행동이 상실을 초래할까요? 그럴는지도 모릅니다. 금욕자 자신이 이기적인 자기도야 만을 목표로 하는 금욕인 경우에는 말이지요. 하지만 타인과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연원된 금욕은 오히려 의욕과 행동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의욕을 타인과 전체의 행복을 겨냥하고 그 행동을 전체의 안녕과 행복을 염두에 두고 행해지며 자신의 안녕과 행복은 고려의 재상이 안 되는 것이지요.

 

- 일찍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앙 교리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렇다 할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네들이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그들에게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자택일의 가능성이 보이는 마당에서만 의혹이 등장합니다. 양자택일과 의혹을 안고 있으면 자연히 확신은 사라지지요.

 

- 우리의 과제는 지상의 교회를 이데아에 합치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