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 In His Hand/Minimal Life(2025~ )

실버시대 - 약사 맞아? : 나를 위한 변명(1)

truehjh 2025. 12. 14. 11:36

약사 맞아? : 나를 위한 변명(1)

 

약사 맞아?” 행복주택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은 지인이 어느 날 나에게 던진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행복주택으로 갈 자격이 있어?”라고 되묻는다. 약사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한다는 세간의 통념에 의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요즈음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싱글이고 자녀도 없어서 부요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난한 장애여성 독거노인일 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일까?

 

그녀는 내가 약사라는 직업에서 벗어나 출판사에 적을 두고 장애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던 시기에,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다. 그 시절에 나는 남동생 집에 얹혀사는, 결혼하지 않은 혹은 못 한, 장애를 가진, 특별한 직업이 없어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약국을 운영했다는 이전의 생업 활동은 좀 더 깊이 오래 만나야 알 수 있는 신상 파악이었기에, 아마도 그녀는 시간이 흐른 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문으로 들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교회 의료선교팀에서 봉사하는 나를 멀리서 보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약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만난 사람의 대부분은 내 직업과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본질에 우선하는 존재로 대우를 받았다. 우리 시대에는 약사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또 사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약사면허증 하나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은 꽤나 유효했다. 그러나 그렇게 좋다는 약사면허증을 가지고도 나는 그 결에 맞는 삶을 살지 못했다. 나에게 약사면허증은 나의 장애를 인식하고 각인하게 만드는 상흔일 뿐이었다. 약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무도 이해해 주려 하지 않았다. 장애로 인해 이끌려온 직업이기에 만족할 수 없노라고 내 입으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 것 같아서였다.

 

약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잠시 하다가 약국을 개업했다. 가난한 목사인 아버지에게는 좋은 친구분들이 계셨다. 그분들 중 부자 아저씨가 조건 없이 선뜻 개업자금을 꾸어주셨다. 그렇게 시작한 약국은 나를 가두는 새장이고 올무였지만, 벗어날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우선 다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꾼 돈 갚는 일과, 우리 가족의 경제적인 안정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삶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약사라는 직업이 주는 경제력이 필요했다. 물론 가족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장애로 인해 고생하고 마음 상했을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살았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안다. 장애를 가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불평하지 않는 형제들의 우애도 잘 안다. 나는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약국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새장을 벗어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날아가는 꿈을 꾸며 살았다. 언젠가는 약사라는 직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내 삶을 온통 주장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벗어날 기회를 엿보며 살았다.

 

드디어 길을 발견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기독교교육학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는데 그 일에서 나는 가장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에 나오는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 학생들, 청년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성장을 돕는 순간에는 나의 장애를 인식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좀 더 나은 기독교교육을 하기 위해서 학문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약국에는 친구를 관리약사로 두고 나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연신원을 휴학했다.

 

약국도 정리했다. 후배 약사에게 양도하고 지방의료원 약제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결혼하여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나는 병원약사로 근무하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욕망을 향한 방황은 더 깊어만 갔다. 그야말로 허무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약국을 개업했다. 형제자매들은 다 자기 삶의 길로 안착해 가고 있었고, 나는 서울 한구석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섬기시는 교회를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은 이미 한국을 탈출할 계획으로 가득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나의 장애와는 관련이 없는 세상 미국행을 실행했다. 그러나 미국약사면허를 획득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은 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살겠다는 거창한 계획과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대신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서만 할 수 있는 많은 경험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인간의 삶을 보았다. 특히 넓은 땅 동서남북으로 흩어져있는 여러 주로 여행하면서 대자연의 장엄함 속에서 겸손을 배웠다.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욕망을 비운다는 의미에서 마지막 꿈을 향한 확인 사살을 감행했다. 결국 꿈은 사라졌고, 청춘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