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문리대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길 건너편에는 화구를 파는 문구점이 여러 군데 있다. 그중 한 허름한 화랑 안에 삼촌을 기다리는 작은 아이가 서 있다. 그 아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생소한 거리를 향해 두리번거린다. (1964년 4월) |
내가 구락부에서 3학년 과정을 마칠 무렵, 군목이셨던 아버지는 또다시 서울 외곽으로 전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해방촌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수유리로 이사했습니다. 우리가 이사한 동네의 이름은 번동입니다. 수유리 번동은 모자원 연합회에서 서울시와 연결되어 구성한 집단촌입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거나 아버지를 잃은 가족을 위해 모자원을 마련했다지요. 해방촌 모자원에 계시던 분들도 자녀를 데리고 나와서 번동에 형성된 공동체에 합류한 상황입니다. 그곳에는 교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제대하시면 그곳에 교회를 세우실 목적을 가지고 번동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우리 집은 61호와 62호 집이었습니다. 두 집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61호에서는 우리가 살고 62호에서는 임시 교회로 사용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사를 했으니 내가 학교를 전학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사하기 전에 다니던 학교가 정규과정이 아닌 구락부라는 이유로 제도권 내의 학교에서 나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일반 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과정을 마쳤지만, 2학년 중간부터 구락부에서 공부한 이력이 문제가 되어 다시 일반 학교로의 전학이 가능하지 않다는 행정절차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 정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나는 장애인으로서 세상과 접하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해 가야 하는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당시 제일 먼저 부딪친 문제는 제도권 내의 장애인 교육 문제의 불평등이었으니까요.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서 뛰어놀지 못하는 나는 구락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집에서 놀았습니다. 우리 반 반장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했고, 우리 반 언니 오빠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이사한 동네에서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여동생이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할 수 있는 놀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동요에 손동작을 붙여 동생에게 가르쳐주며 노는 학교 놀이, 동화책을 읽고 외워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놀이 등등이 그때 하던 놀이입니다.
예쁘고 착한 막냇동생은 나의 말을 잘 들어주었습니다. 보자기를 뒤집어씌우고 긴 머리카락처럼 만져주는 미장원 놀이도 했으니까요. 남동생이 있는 날이면 같이 의자를 이어놓고 기차놀이를 했습니다. 같이 놀아주는 동생들이 없는 날에는 종이로 인형 옷을 만들고, 헝겊으로 인형을 만들고, 혼자 놀았습니다. 그래도 심심하면 작은 보물 상자를 열어보곤 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만의 보물 상자에 대한 애착이 있었습니다. 예쁘고 작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작은 상자에 모아두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하얀 솜을 깔고 그 위에 예쁜 구슬들을 모았습니다. 머리핀이나 가짜 목걸이와 팔찌, 반질반질한 조약돌도 넣어 두었습니다. 궁금하면 열어보고 만지작거리다가 닦아서 다시 넣곤 했습니다.
내가 즐거워하던 놀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공깃돌 놀이입니다. 방의 한구석에 모아놓았던 반질반질한 공깃돌을 꺼내놓고 ‘한번은 내가 하고, 한번은 가상의 네가 하고’ 이렇게 번갈아 가며 1인 2역을 즐기는 혼자 놀이입니다. 휴일에 가끔 아버지와 함께 하는 공기놀이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공기놀이는 주로 내가 이겼습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 하셨지만 작은 공깃돌을 다루기가 어려우셨던 모양입니다. 내기에서 지시면 손이 커서 작은 돌이 잘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변명하셨습니다. 물론 내가 이기는 것이 좋아서 나는 자꾸 아버지에게 공기놀이를 하자고 졸랐던 것이겠지요.
놀이 말고도 가끔 심취하던 취미가 있습니다, 마음이 심드렁해질 때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은 자유로운 빨주노초파남보 상상의 나라였습니다. 크레파스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나무는 색을 입고, 숲은 울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시냇물은 졸졸졸 흐르게 됩니다. 살아보니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레파스처럼 자기가 닳고 또 닳아야 삶에서 아름다운 색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희생이 없으면 인생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그렸을 뿐이었겠지요.
구락부에서 대학생 선생님이셨던 삼촌이 수유리 우리 집에 놀러 오셨을 때 내 그림을 우연히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림 숙제를 내주시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숙제 검사를 하러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등 미술 재료들을 구입해서 선물로 가져오시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화방으로 직접 데리고 가기도 하셨습니다. 어린 조카의 소질을 알아보고는 미술 공부를 시키려는 속셈이 있었나 봅니다.
그때 남겨진 아련한 추억의 장면이 있습니다. 서울대 문리대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길 건너편에는 화구를 파는 문구점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그중 한 허름한 화랑 안에서 초조하게 삼촌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데, 삼촌은 나를 화랑에 맡겨 놓고 학교 안으로 잠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삼촌은 꼬마 조카에게 좋은 화구를 사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 앞길을 지금은 대학로라고 부르지만, 오래전 개천을 덮어 만든 길입니다. 그 길은 학생 삼촌의 갸륵한 희망이 움트는 거리였습니다.
그림과 삼촌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은 여기서 멈추고 맙니다. 그 당시 문리대 4학년 학생이었던 삼촌은 그해 여름방학에 해방교회 구락부 학생들을 데리고 한강에 나가서 수영을 가르치시다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림의 후원자셨던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난 그림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꿈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촌의 부재와 함께 잊혀진 꿈입니다. 가끔 그림에 대한 갈망이 생길 때마다 화실을 기웃거려보기도 했지만, 삼촌이 크레파스로 그려주신 정물화 한 장이 동그랗게 말려있는데 펼쳐보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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