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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시니어진입기(05) - 취미는 선택

truehjh 2012. 11. 5. 13:03

취미는 선택

 

몸의 건강을 개선하고 유지하기 위해 운동이 필요하듯이, 여가시간을 의미 있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취미생활도 필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취미를 선택해서 익히는 것 역시 은퇴 후 활기찬 노후의 삶에 대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다.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활동은 다양하다. 그중 나에게 맞는 취미활동은 무엇일까.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싶고,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바느질도 하고 싶고, 어렸을 때 꿈이었던 그림도 배우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다 하기에는 벅차다. 여행은 기회 생길 때 가면 되고, 바느질은 찾아가는 과정이 복잡하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손쉽게 접근 가능한 그림을 배우기로 했다. 그림 중에서도 연필과 스케치북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연필인물화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그리다물건의 형상, 사상, 감정을 그림이나 글, 음악으로 나타내다라는 의미의 말이기도 하지만, ‘없어진 대상을 회상하거나 상상하다또는 사모하다,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품다라는 의미의 말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나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이면서 내 전 생애를 통하여 마음에 품고 있는,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그 그리움이다. 여덟 살 때의 일이던가. 남산에서 열리는 어린이 사생대회에 나갔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서울 풍경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렸다. 내 그림은 우리 학교 교장실 옆 복도에 전시되었고, 내가 전학을 간 이후에도 걸려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그림과 연결된 내 최초의 기억이다.

 

그 이후로 그림에 관심이 많은 외삼촌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물리학도였던 삼촌의 책상 위에는 흰 머리카락이 날리는 아인슈타인의 사진과 함께 색연필들이 늘 놓여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어떤 그림을 그리셨을까. 삼촌은 우리 집에 오실 때 화방에서 구입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다주셨고, 한 달에 한 번씩 숙제 검사도 하셨다. 숙제로 내준 양보다 더 많이 그려놓고 삼촌을 기다렸던 나는, 집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온갖 물체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을 즐겼다.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아이가 할 수 있는 놀이는 어쩌면 손으로 그리고, 쓰고, 만드는 것이 전부였었는지도 모른다. 야학에서 대학생 교사로 봉사하던 삼촌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나는 그림과 멀어졌다. 그림에 대한 흥미는 다정하고 멋진 삼촌의 모습과 함께 사라졌다. 막연한 그리움만 남기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다시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약국 생활에서 잠시잠시 틈을 내어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십이 지나 시간의 여유가 생길 때쯤 또다시 그림이 그리워졌다. 입시학원도 다녀보고, 문화센터도 다녀보고, 화실도 다녀보았지만 그리움을 품은 것만으로 끝이 나곤 했다. 삼촌이 직접 그려주셨던 정물 스케치 한 장을 가벼운 마음으로 꺼내볼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그렇게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시니어의 삶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그 그리움이 먼저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최근에 동네 문화센터에 가서 연필인물화를 배울 기회가 생겼다. 하얀 종이 위에 선과 면을 만드는 연필 소리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덧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는 기분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다. 연필의 얇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잡고, 표정을 그려나가다 보면 지면이 가득해진다. 다시 어느 정도 형체가 드러나면 나 스스로도 신기함을 느낀다. 그것은 작은 창조의 기쁨이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형체를 탐닉하고 있으면 세상은 오로지 나와 아직은 숨겨져 있는 종이 위의 대상 단 둘뿐이다. 다른 아무것도 그 사이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천하에 홀로가 아닌, 그림 속의 대상과 함께 유유자적하는 행복감이다. 어느 정도 완성을 향해 가면 마음이 들떠서 여기저기 자꾸 손을 댄다. 그러다 보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95%까지만 가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미완성의 한계점을 넘어가기란 쉽지 않다. 끈기를 가지고 조금 더 정진해 가야 하는데 쉽사리 멈추는 나의 버릇은 여전하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속에서도 느껴진다. 바로 쉽게 포기하는 습성, 치열함으로 다가가기를 거부하는 습성, 아니 두려워하는 습성, 끝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습성, 이것이 바로 나의 한계다. 그러나 취미로 그림을 그리면서까지 극기 훈련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림을 통해서 전문가로 나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것이 나선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단지 내가 즐기고 소통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풍요로운 노후를 준비하는 과정 중에 하나로 충분하다. 이것이 젊었을 때 그림을 대하는 자세와 다른 점이다. 지금 나에게 다가온 기회에 충실하며 그리는 과정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