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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마음에서 피는 꽃] 잔인한 4월의 하얀 목련

truehjh 2006. 4. 12. 14:51

잔인한 4월의 하얀 목련

 

목련은 4월을 대표하는 나무꽃이다. 한겨울의 추위가 고비를 넘겼는가 싶으면 벌써 목련나무 가지 끝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메마른 가지 끝에 황금색 털이 덮여 있는 꽃눈이 돋아나고 북쪽을 향해 꽃봉오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꽃잎이 부풀어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은 마치 하얀 새들이 모여 앉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련나무가 흰 새들의 우아한 안식처이기나 한 듯...

 

목련꽃은 꽃이 크고 향기도 좋아서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또한 아주 오래 전부터 축농증에 특효약으로 쓰이고 있는 신이는 채 피지 않은 목련 꽃봉오리를 말한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면서 시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목련은 그 느낌 또한 꽤 다양하다. 꽃봉오리의 단아함, 만개했을 때의 화려함, 꽃잎을 떨굴 때의 참혹함, 그리고 잎눈이 터질 때의 새로운 희망 등으로 우리네 정서에 특별한 인상을 남겨주는 꽃이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위의 구절은 류시화 시인의 시 목련의 앞부분이다. 나에게도 목련꽃 이미지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애잔한 노랫말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 ’을 생각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잔인한 4이라고 각인 된 어느 해의 하얀 목련에 대한 회상이다. 그리고 삶의 허무함보다 더 가슴 아픈 삶의 잔인함에 대한 기억이다.

 

인정이 없고 몹시 모진 행위를 보고 우리는 잔인하다고 표현한다. 그 해 사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었다. 그 때 나는 근교에 있는 도립병원의 약제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병원 약국 창문 앞에는 백목련 한 그루가 아주 품위 있게 서 있었다. 긴 겨울을 지나 만물이 기지개를 펴면 약국 앞 목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봄기운이 시작된다. 나는 그 나무를 무척 사랑했다. 애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담겨있는 우주가 느껴졌다. 시간의 변화뿐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미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나의 사랑에 시샘을 하는 기운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겨울 장군의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목련이 탐스럽게 꽃봉오리가 생기고 막 피어오르려는 때에 때 아닌 폭설이 내렸던 것이다. 약국의 창문 너머 싱싱하게 피어오르며 한껏 자기를 과시하며 뽐내고 있던 하얀 목련의 꽃봉오리 위에 눈이 쌓이고... 그 날 밤 그리고 그 다음 날 낮이 온통 차가운 눈비바람으로 가득하던 날... 나는 차마 목련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4-5일이 지나갔다. 목련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 며칠이 나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사춘기의 시절을 지내는 것 같이 길었고, 가슴이 터지도록 아픈 실연의 긴 세월을 보내는 것 같이 안타까웠다.

 

그 날 이후 목련은 빛을 잃었다. 출근길에서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기던 목련의 아름답던 자태는 어디가고 색 바랜 모습으로 우울하게 나를 맞았던 것이다. 나는 쓰라린 가슴을 안은 채 잔인한 사월의 하얀 목련이라 명명하고, 얼어서 떨어진 꽃잎들을 애도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봄이 되면 따뜻함을 기대하게 되고, 아름다운 사람의 미소를 보면 부드러움을 기대하게 되고, 사람이 좋아지게 되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기대가 무참히 짓밟히면 잔인하다고 울부짖으며 가슴 아파한다. 생명들이 움트는 삼월이 지나고, 아지랑이 올라오고 좀 나른한 기분으로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느슨함이 있는 사월에, 겨우내 숨어있던 꽃봉오리 터지고, 꽃과 잎새들이 한껏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놓으려하고 있는데, 그 수줍은 용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심술을 부리듯 눈이 내려 꽃 지게하고, 연약한 잎새를 얼어붙게 하면 그것이 어찌 잔인함이 아니겠는가.

 

만물이 무르익는 계절에 그 기대를 무참히 지워버리게 하는 재해가 발생한다면 자연의 잔인함을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을 무지하게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관심을 확인할 수 없다면 사랑의 잔인함을 알게 된다. 품은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거나 늙어 갈 때에 삶의 잔인함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 위로받고 싶은 것, 사랑하는 것들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속절없이 잔인함이 느껴진다.

 

일이 잘 성사될 것 같다가 불가항력적인 일로 인해 마무리를 할 수 없게 될 때, 꿈을 향해 달려 가다가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인해 중간에 포기하게 될 때, 건강한 젊은 사람이 갑자기 병을 얻어 투병으로 시간을 소모하게 될 때, 부모를 편히 모실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될 때, 아직 보호 받아야만 하는 어린아이가 홀로 세상에 남겨지게 될 때... 우리네 삶에서 이렇게 가슴 아픈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잔인한 사월의 하얀 목련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다. 그 슬픔의 노래는 다 피지 못하고 사라진 영혼들에게 바치는 가슴 저린 나의 진혼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