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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마음에서 피는 꽃] 제비꽃과 어머니

truehjh 2008. 8. 24. 20:00

제비꽃과 어머니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약국 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4차선 거리가 눈 안에 들어온다. 그 길 건너편으로는 높은 아파트 군락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원래 상가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실용적이고, 상업적이고, 도시적인 공간이다. 그곳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이나 도로를 달리는 차들에게서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시야는 언제나 콘크리트 벽안에 갇혀 있거나, 유리창 틀에 걸려 있다고 느끼며 지냈다. 단지 아파트 숲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그리워하곤 했을 뿐이었다.

 

어느 봄날, 점심 후의 나른한 오후에 어머니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가난한 시절에 약한 몸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배움의 기회를 주시느라고 무지하게 고생하신 우리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딸이 일하고 있는 약국에 들르곤 하셨는데, 그 날 어머니의 작고 마른 손안에는 다섯 송이의 진보라빛 제비꽃이 들려 있었다.

 

아파트 사잇길로 사알 살 걸어오시다가 우연히 보니 돌담 아래 땅하고 맞닿은 부분을 따라 제비꽃 여러 송이가 쭈욱 피어 있더란다. 시멘트 바닥을 피해 좁은 땅 사이로 오롯하게 머리를 내밀고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던 길을 멈추어 서고 허리를 굽혀 앉아서 한참을 들여다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중년의 딸에게 보여주시려고 그 중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오셨던 것이다. 들꽃이 언제 피고 지는지 알 수도 없는 생활이 연속되는 바쁜 삶의 환경을 안타깝게 여긴 내 어머니의 소박한 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제비꽃이었다.

 

제비꽃(Viola seoulensis Nakai)은 한번 뿌리를 내리면 같은 자리에서 해마다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양지 아무데서나 잘 자라면서 원 줄기는 없고 뿌리에서 긴 엽병이 있는 잎이 돋는다. 꽃이 예쁘고 자그마하여 유심히 들여다보면 한결 더 귀여워 보이는데, 민들레와 함께 우리나라 풀꽃을 대표한다고 한다. 노란색, 흰색, 연보라색, 분홍색, 자주색 등 많은 색깔의 꽃을 피우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진보라빛과 진초록이 어우러진 제비꽃을 나는 좋아한다.

 

푸른빛을 띄는 보라색 올망졸망한 꽃망우리들이 수줍어 고개를 숙였는지 짙은 연두색 꽃받침이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다. 살며시 피어난 각 꽃잎들은 자유롭게 방향을 잡고 오밀조밀한 조화로움을 드러낸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짙은 보라색과 진초록의 조화는 자연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배색이다. 제비꽃과에 속하는 베르나 팬지, 골든 크라운 팬지 등 유럽이 원산지인 꽃들의 화려한 아름다움도 있지만 한국이 원산지인 제비꽃의 아름다움과는 견줄 수 없는 것 같다.

 

중세 유럽에서는 제비꽃이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 밑에서 피어난 꽃이라 하여 매우 소중하게 여기기도 했단다. 제비꽃은 맛이 쓰고 매우며 성질은 차서 열을 내리고 독을 풀며 갖가지 균을 죽이고 염증을 없애는 작용이 있다. 뿌리는 치통, 지혈 등에 약으로 쓰인다. 또한, 이른 봄에 돋아나는 어린잎은 봄나물로도 쓰이며 데치거나 혹은 생으로 샐러드로 이용하기도 한다.

 

 

땅기운을 얻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 자그마한 생명들에게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 자연의 질서를 쫒아 돋우고, 피고, 지고를 계속하면서 모든 생명에게 이로움을 미친다. 땅을 정화하고, 공기를 정화하고, 우리네 정서를 정화하고, 몸을 치유하며, 영양을 공급하면서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 마치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우리 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제비꽃의 수줍음과 강인한 소박함은 이 땅의 이름 없는 어머니들, 아니 어머니란 이름으로만 존재해 오신 그 분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 같다. 드러내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내놓은 늙으신 어머니이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우리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내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라는 제비꽃에 대한 어느 시구(시인 안도현의 <제비꽃에 대하여>)와 같이, 욕망과 과속과 불신과 원망을 버리고 겸허하게 내 마음 안으로 시선을 옮겨야 어머니가 느껴지니 말이다.

 

나의 어머니는 낙엽처럼 가벼운 무게로 지금 내 곁에 계신다. 왜소해진 육체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내 곁에 계신다. 피부에서 떨어지는 건조한 편린들과 함께 새털 같은 몸짓을 하며 말없음표로 남아 계신다. 늙으신 어머니! 그 위대한 이름.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되며 용기가 되는 이름... 제비꽃의 소박하고도 수줍은 아름다움에서 내 어머니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그리운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