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아버지를위한노래

1-01) 작은 성경책

truehjh 2011. 8. 1. 20:12

 

1998. 08. 14. 작은 성경책


아버지는 남방셔츠가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시면서 들어오셨다. 힘이 드신 모양이다.

엄마는 수선스레 아버지 얼굴의 땀을 닦아 드리며 핀잔 섞인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앉지도 못하신 채로 그냥 웃고만 서 계시는 아버지의 태도가 평소와는 달랐다.

아버지의 겉옷을 받아들면서 엄마는 또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혼자 길을 나선 것도 걱정이 되어 못마땅했지만 입고 계신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복에 까다로운 그녀로써는 후줄근하게 늘어진 잠바를 입은 남편의 모습이 초라해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무거운데 성경책은 왜 넣어 가지고 다니세요? 글씨가 작아서 읽을 수도 없을텐데... 몇 십 년을 가지고 다니셨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가지고 다니세요. 녜?”

“잠바가 얇으니까 성경책 넣은 속주머니가 늘어지잖아요...”

“이렇게 더운데 왜 이 잠바를 입으셨어요. 다른 셔츠를 입고 오시지...”

계속되는 엄마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이 정도쯤 되면 쯪쯪 혀를 차면서 부인을 제지할 어떤 말씀을 하셨을 것 같은데 그냥 힘없이 웃고만 계셨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열을 올리는 부인이 한심해 보인다는 뜻인지 아니면 애처롭게 보는 마음이 생기셨는지 알 길이 없었다.


1시쯤 점심식사를 하시고는 잠시 앉아 계시더니 교회로 가시겠다고 하시며 일어나셨다.

모두 반대했지만 그분의 고집은 아무도 꺽은 적이 없었다. 의정부 작은 아들집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큰딸이 궁금해서 오셨겠지만 아마도 내심에는 작은아들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본교회에 들려서 새로 오신 목사님의 사택수리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을 것이다.


작은아들이 모셔다 드리겠다고 나서며 조금 기다리시라고 했다.

다시 아버지는 소파에 앉으셨는데 그때 TV에서 금강산 관광이야기가 보도되고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지난번에 금강산 가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당신하고 둘이서만은 못가요 힘들어서... 아들 둘 중에 하나가 모시고 가겠다고 해야 갈꺼예요’라고 말했다.”라고 하시면서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셨다.

이북에 한번만이라도 가보고 싶은 것이 그 분의 유일한 소원일지도 모른다.

휴전선 너머로 바라보기만 했던 고향 땅...

거의 60년 전 자신에게 꿈을 심어주던 남시가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그 곳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수없이 가보고 싶었던 마음을 어떻게 진정시키셨는지... 분단의 비극을 직접 경험하신 세대들의 단절되는 아픔을 젊은 세대가 그 크기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그날 저녁에 ‘아버님이 집에 잘 도착하셨다’는 큰며느리의 전화보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