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아버지를위한노래

1-05)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명절

truehjh 2011. 9. 8. 23:33

 

1998.10.06~.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명절


추석 전 날인 주일 저녁에 모든 식구가 오빠 집에 모였다. 신목사가 막내에게 아버지와 보내는 마지막 추석일 것 같으니 이번에는 친정에서 보내자고 하여 다 모일 수 있었다. 집안에 목사님이 있으니 대소사에 듬직하고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께서도 온 집안에 그리고 먼 친척에게까지 신뢰를 받는 집안 목사의 역할을 잘 감당하셨겠지. 보통 목사님이 아니라고 친척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추석날에는 아버지를 씻겨드리는 일로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침대에 큰 비닐을 깔고, 수건을 여러 장 준비하고, 크고 작은 물 대야들을 방안으로 가지고 왔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온 몸을 닦아드리고, 발까지 다 씻겨드렸다. 큰며느리, 작은며느리, 두 딸, 부인 이렇게 여자들이 모두 분주할 때 아들들과 사위의 마음도 분주했던지 가끔씩 먼발치에서 지켜보다 갔다. 오빠는 기분이 이상하다며 한마디하고 갔다.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누워 계신 아버지 곁에서 막내와 나는 찬송을 불렀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견딜 수가 없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어 드리는 우리의 마음은 눈물이 되었다. 찬송 소리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슬퍼 보이면서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 그 분은 마음속으로 또 다시 결단을 하고 계셨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우리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네 번째로 코줄을 뽑아 놓으셨다. 그것을 발견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계신 것이다. 생명보다 더 평화로운 죽음을...

평소의 아버지는 원인규명을 철저히 하시는 분으로 이유를 달고 정리하여 결론을 명백히 하는 성격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식솔들에게는 그럴싸한 명분을 세워주고, 하나의 완성된 극같이 자신의 죽음을 어디 쯤에 배열해 놓아야 하는 가를 완벽하게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견해가 ‘몇 가지 광적인 신념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공격을 받아도 할 수 없다. 10여 년 전 아버지가 처음 쓰러지셨을 때 75세 까지는 살려주셔야 한다고 절규했던 나의 기도, 그리고 몇 달 전 안경점에서 있었던 일, 아프시기 얼마 전에 미리 엄마에게 말씀하신 통장의 거취, 미국에서 온 편지, 그리고 또 의미 있는 세레모니 후에 몇 번에 걸친  그 분의 결단 등 몇 가지 증거들을 가지고 나는 주장할 수 있다. 그 분은 죽음을 예감하셨으며, 죽음에 대한 가장 명예로운 방법도 알고 계셨으며, 그리하여 준비하며 선택하기로 결단하고 행동하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물은커녕 약도 드실 수 없잖아요. 코줄을 빼셨으니...”

그분은 작게 우셨다. 그분의 결단 속에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명이... 실낱같지만 살아있는 생명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공포를 어찌 그분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인가. 단지 결단하고, 그 결단에 신념을 붙들고 이겨내려 하고 계시리라. 자신의 죽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는 생각은 할머니의 임종을 의식하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에미야, 아범아...”를 하룻밤에도 수없이 불러대시며 2-3년을 누워 계시던 할머니. 잠이 부족한 아들 내외를 몇 번이고 깨워서 몸을 움직여 달라시던 그분의 홀어머니인 나의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나의 아버지다. 자신의 고통은 홀로 자기가 감당하시기로 결단하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처연한 결단이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남은 가족을 위한 것일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뭉클하게 저미어져 온다.


그날 밤 우리 식구 모두는 아버지 곁에 둘러앉았다. 신목사의 인도로 찬송 부르고, 성경 읽고, 말씀 듣고, 연하여 기도하고, 이렇게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경배했다. 각양 각색의 신앙상태였지만 목사님의 가정다운 모습으로 참여한다고 자신의 자녀들에 대하여 아버지는 안심하셨을까.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아버지와 남은 가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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