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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예배드리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될 때가 온다 (요 4 :22)

truehjh 2020. 3. 4. 21:45

어디서 예배드리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될 때가 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어둠 속에서 확신 없는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유대인들은 밝은 대낮에 확신에 가득찬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유대인들을 통해 열린다. 그러나 너희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어디서 예배드리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될 때가 온다. 사실은 그때가 이미 왔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너희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너희가 드리는 예배는, 너희 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예배여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 곧 그분 앞에 단순하고 정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순전한 존재 그 자체, 곧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영과 자신의 참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 요한복음 4 : 21~24 -

 

밤새도록 꿈에 시달렸다. 발을 헛디디는 꿈이나 소변을 참으며 화장실을 찾는 꿈이 어릴 적 나를 괴롭히던 꿈이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옛집을 찾아가는 꿈, 수유리 사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공사를 하거나 눈이 와서 빙판이 되었거나 비가 쏟아져 버스 번호가 안 보여 앞으로 뒤로 뛰면서 개고생하거나 택시를 잡으려는데 안 잡히는 꿈에 시달린다. 헤매는 꿈을 정착지의 평온함으로 바꾸고 싶다. 이제 안정된 곳에서 마무리할 준비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겠다.

 

2015년부터 다음 교회에서는 할 수 있는 것 다 하면 된다고 기도했다. 20-16년에는 좋은 교회로 인도해 주세요가 기도 제목이었다. 2019년 초에 다니던 교회를 옮기면서 운정교회에 등록했다. 그러고도 공동체의 삶과 비슷한 맥락의 도봉제일교회를 계속 생각했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경우는 처음 당하는 것 같다. 언제나 오로지 하나를 정해 놓고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인도하시는 대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 년 동안 기다리려 한다. 아니 기다리는 방법 안에는 없는 것 같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했던 교회에 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방향성이 잡혀지며 마무리될 것 같다. 의미를 추구하고 싶어서 도봉제일교회 옆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과 재미를 느끼며 교회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은 운정교회 옆으로 이사 가서 정착해야 할 것 같은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여 팽팽하게 맞서서 평정심을 흔들어 놓았었다. 어렸을 적의 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가 없다. 가족이었던 교회는 이미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은 교회당이고 이름뿐이다. 아버지와 엄마도 계시지 않는다. 함께 성장했던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 서서히 한편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선 첫째는 도봉동으로 이사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적정성을 찾을 수 없고 두 번째는 지금까지 연결되어있는 파주네트워크와 울타리가 되어 주는 정열이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 도봉동에 없다는 것과 가서 새로 개척하기에는 나의 나이가 너무 늙었다는 이유다. 도봉교회를 선택하지 못하는 대신에 소리들에서 도봉제일교회와 연결된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도움이 되고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일을 당분간 찾아보고 시도해 보아야겠다. 사실 운정교회 옆으로 이사 간다는 것도 지금의 형편으로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영태리 문제가 해결된 후에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니, 너무 조바심치지 말고 여유 있게 생각하자.

 

복잡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동안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나의 계획이나 생각들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다. 중국 우한발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국에서 대구를 중심으로 창궐하고 있는 지금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가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다.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 가운데 앞으로의 계획에 빠져서 고민하고 불평했던 일들에 대한 반성이다. 결국은 교회 옆에 살고 싶다는 꿈 하나를 또 버렸다. 코로나19 덕분이다. 자연재해 앞에선 인간의 무능력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오직 신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영상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답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물리적으로 교회 옆으로 이사 간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움직이기 곤란할 때가 되면 교회를 의지하려는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상을 통해 예배자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번 코로나19 재난을 통해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예배자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해답을 얻은 것같아 마음이 단순해진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하는 삶이면 그것으로 만족이고 그것으로 천국이어야 한다.

 

교회 옆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현대사회에서 교회 옆에 살고 싶다는 꿈은 이상일 뿐이다. 대형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성실한 형제들을 주셨기에 그들과 함께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한다. 현실은 변한 게 하나도 없지만 마음에 정처를 주시고 순간이나마 감격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