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송이
12월을 맞게 되면 하얀색을 향한 그리움이 일곤 한다. 아마도 하얀 눈에 대한 아련한 추억으로 새겨진 그리움일 것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음이 들뜨지 않는 사람은 없다. 특히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눈 내리는 벌판으로 온 동네 아이들이 뛰어 나와 소리를 지르며 놀았다. 함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다가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눈송이를 받아먹기도 하고, 두 손을 올리고 손바닥에 눈송이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눈 오는 날이면 어릴 적 기억 속에 잠겨 입속에서 맴도는 동요를 흥얼거리곤 한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는 노래다. 여러 번 반복해서 불러도 역시 아름다운 노랫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또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곡조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눈의 형상을 잘 기억하고 있다. 육각의 균형 잡힌 도형으로 대칭을 이룬 눈의 입자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정밀하게 그려내어 장식용 도형에 응용하고 있어서, 크리스마스 계절이 되면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눈꽃송이들을 여기저기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나는 ‘눈꽃송이’라는 단어 자체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가지 여운을 남기는 이 말은 누군가 눈을 자세히 관찰하고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하얀 눈으로 만들어진 꽃송이... 신비함을 느끼게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실체를 알게 되면 가슴앓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손에 쥐었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 눈꽃송이는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따뜻한 손 위에서 눈꽃의 자취는 금세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엔 차가운 물방울만 남아있는 것이다.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실존과 허상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가슴엔 아직도 뜨거운 열정이 남아있는데 그냥 찬 기운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말이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눈앞에서 바로 이루어질 것 같은 그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특히 12월이 되면 이러한 경험들이 더 많이 생각나는 것 같다. 희망과 기대로 부풀었던 연초에 비하면 아쉬움과 미련이 많이 남는 연말이기 때문에 움츠릴 수밖에 없는 시간을 맞게 되기에 말이다. 그래서 12월은 새해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주는 달이기도 하지만 또한 후회와 아쉬움을 주는 침울한 달이며, 한 해 동안 살아온 것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새로운 다짐과 희망이 생겨나는 달이기도 하지만 연초에 계획했던 아름답고 멋있는 가능성의 세계로부터 암담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계절에는 누구라도 지나간 세월을 반성하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나를 되돌아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들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해 질 때면 누군가를 만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만나서 서로를 위로하고 자신의 현 위치와 상황을 확인하여 보는 시간을 마련하는가 보다.
굳이 망년회는 아니더라도 한 해 동안에 했던 일들을 한번 살펴보면 나 자신만을 위해 한 일, 가족을 위해 한 일, 이웃을 위해 한 일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못해서, 할 수 없어서,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한 일도 있고, 너무 즐거워서, 푹 빠져서, 하고 싶어서 한 일도 있다. 억지로, 건성으로, 투덜거리며, 반항하며 한 일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뒤돌아보면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하는 일이 역시 효과가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내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도 즐거움을 가지고 미쳐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꼭 하고 싶어 하는 일이어야 즐거운 광기를 발휘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흰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하늘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세월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자. 그리고 지나간 일들을 기초삼아 새로운 한 해를 꿈꾸며, 즐거운 광기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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