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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마음에서 피는 꽃] 물망초와 첫사랑

truehjh 2006. 12. 1. 23:30

물망초와 첫사랑

 

년말이 되어서 시간을 되돌아보면 잊을 일도 많고 잊지 말아야 할 일도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가운데는 명확하게 잊어야만 할 것 같은 사건이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잊어서는 안 되는 또는 잊고 싶지 않은 사건이나 사람도 있다. 아마도 잊고 싶다는 것은 슬픔이나 괴로움이 되었다는 의미일 터이고 기억하고 싶다는 것은 기쁨이나 행복을 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잊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 같기도 한 기억 중에 하나가 물망초에 얽힌 첫사랑의 기억이다. 때때로 나는 물망초라는 꽃 이름이 들어 있는 노래로 인해 여섯 살 꼬마 소녀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찾아가곤 한다.

 

사람들은 여섯 살 난 아이의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겠지만 그래도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인간의 인생 여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그냥 웃고 지나갈 이야기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또한 그러한 이유를 가지고 나는 유치원에서 만난 그 꼬마 소년을 나의 첫사랑이라고 굳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아이의 집은 우리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윗집과 아랫집 정도의 거리여서 손 붙잡고 같이 유치원에 가기도 하고 심심하면 우리 집 현관 앞에 와서 ~ ~ ~ ’를 외쳤던 아이다. 난 그 아이와 함께 양지바른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콩장을 나누어 먹곤 했다. 두꺼운 종이를 번데기 담는 봉투 모양으로 접어 그 안에 콩장을 듬뿍 담아 내와서 너 한 알... 나 한 알... 하며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먹을 것이 흔치 않던 시대라서 반찬으로 먹는 콩장을 들고 나오면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까만 콩을 물과 간장에 넣어 삶다가 물엿이나 설탕을 넣고 끓여서 식히면 달작지근하고 짭짤한 그러면서 반짝거리는 반찬이 된다. 딱딱한 콩장은 치아를 운동시키며 씹는 동작은 뇌를 자극해 두뇌개발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는 그러저러한 이유라기보다 콩이 영양 보충을 위한 값싼 식품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식탁에 콩장이 없으면 한말씀 하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엄마는 콩장을 참 맛있게 만드셨다.

 

우리가 졸업할 무렵 크리스마스 씨즌과 함께 원아들의 발표회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재롱잔치 정도일 터이고 더 크게 말하면 졸업파티라고나 할까. 발표회는 인사말, 송사, 답사, 독창, 중창, 합창, 단막극, , 동시 등 다양한 장기를 자랑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춤을 추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왼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가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유치원 수업이 끝나고 발표회 연습을 하는 시간이 되면 나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유치원 마루 한쪽에 동그마니 앉아 내가 좋아하는 그 남자아이가 다른 예쁜 여자아이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6살 난 작은 여자아이였던 나는 착하고 순하게 생긴 남자아이랑 춤을 추고 싶었던 것이다. 사뿐히 뛰어 오르기도 하고 동그란 원을 그리기도 하면서 노래 한 곡이 다 끝날 때까지 춤을 추는 그 여자아이가 바로 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나의 현실과 소망이 분리되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춤곡은 돌아오라 쏘렌토로...’였다. 유치원 졸업앨범에 그 사진이 실려 있다. 얼굴의 윤곽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사진이지만 사진의 제목이 돌아오라 쏘렌토로라고 진한 글씨로 써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춤곡이 돌아오라 소렌토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난 아직도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어떻게 춤곡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고이 잠든 저 바다는 영원한 꿈나라, 그대의 노래와 같이 잊을 수가 없어라,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으리, 그리운 그대는 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잊지 못할 이곳에서 홀로 피는 물망초,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쏘렌토로 돌아오라’.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가사인지라 노랫말의 중간 중간이 확실하지 않지만 홀로 피는 물망초라는 대목이 언제나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물망초(Myosotis scorpioides)나를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라는 꽃말을 가진 한두해살이풀로 전체에 털이 많고 줄기에 달린 잎은 잎자루가 없으며 긴 타원형으로 어긋나게 나온다. 키가 작은 화초이며 양지바르고 수분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꽃은 5~6월에 피는데 꽃봉오리는 복숭아색이지만 피고나면 코발트색으로 변한다. 잊지 말아달라는 꽃말만큼이나 처연한 코발트빛의 꽃은 보는 이의 가슴에 오래도록 그 여운을 남겨 놓는다. 마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절함과 부끄러움처럼... 그리고 현실과 꿈의 괴리감으로 상처입고 남겨진 흔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