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antary&Faction/My Story In His Hand(1955~ )

(002) 첫 기억의 잔상

truehjh 2006. 11. 3. 09:30
작은아이가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바로 몇 발자국 앞에는 웃는 얼굴의 할아버지가 서 있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향해 오라고 손짓하다가 두 팔을 벌리면서 ‘꼬까... 꼬까...’라고 부른다. (1957년 가을)


내 첫 기억은 할아버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돌 지난 아이의 기억을 참이라고 말하기는 어폐가 있을 것 같아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새겨진 잔상이라고 해두려고요. 그 선명한 잔상 속의 작은아이는 바로 나이고, 웃는 얼굴의 할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는 두 손을 마주쳤다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꼬까... 꼬까...”라고 부르며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셨습니다. 그러나, 팔을 벌리고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께 나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왼쪽 다리가 마비된 나는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 사실을 할아버지가 모르셨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오라고 하는 손짓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손녀를 움직이게 하려는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나보다 4살 위 오빠인 장손에게는 아주 무섭게 대하셨던 할아버지가 손녀인 나는 무척 예뻐하셨다고 합니다. 방긋방긋 잘 웃고, 투정도 부리지 않아 순한 아이였다고 하니 무뚝뚝한 손자보다 귀여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할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애칭이 ‘꼬까’였답니다. ‘꼬까’는 알록달록 곱게 만든 아이의 옷이나 신발을 이르는 말이라지요. 꼬까옷, 꼬까신발이라고 하는 것처럼 ‘꼬까손녀’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 남겨진 기억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나무로 된 반닫이 서랍장 위에 누군가가 나를 올려놓았습니다. 나는 아래로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 공포의 장면도 소아마비에 걸린 손녀와 함께 놀아주시는 할아버지의 애정 표현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추측해 봅니다. 잘 걷지 못하는 어린 손녀를 위해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있는 어른과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놀이라고나 할까요.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는 아이와 놀아 줄만 한 특별한 놀이 방법을 찾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기에 고향에 계셨을 때나 남한에 내려오셔서나 집에 정착하고 계신 분은 아니었답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이 자라는 동안에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인 자신에게 보여준 아버지로 살아가는 태도에 동의할 수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량이셨던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셨나 봅니다. 할아버지가 선택한 삶이 아버지에게는 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셨겠지요. 

할아버지에 관한 다른 기억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남동생이 태어난 다음 해, 그러니까 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짧은 기간만 외아들인 우리 아버지 집에 함께 거하셨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손녀인 나에게 사랑의 기억을 남겨 주셨던 것입니다. 아주 어린 나이의 내 기억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개의 장면은 유년 시절의 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있었습니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기억과 잔상, 현실과 사실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기억이 아니고 이야기로 들어서 만들어진 잔상이라 할지라도, 현실이나 사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나는 그 최초의 잔상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습니다. 남아있던 잔상은 세월이 더 흐를수록 최면에 걸려있는 듯 점점 아스라해지고 말겠지요. 아니 벌써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 가장 첫 번째 기억의 장면이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 못하던 시절과 연결된 기억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소아마비라는 단어는 내 평생 삶의 시간을 이끈 방향키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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