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Basecamp/Note

하나님의 뜻 / 차정식

truehjh 2013. 2. 26. 21:09

출저 : 한일정신대학교 신학부 교수(차정식 교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없는 것과 같다."

K교수의 이 한 마디가 요즘 내 기억 속에 달라붙어 맴돌았다. 하나님의 뜻을 주관적인 기분에 따라 편리하게 소비하고 남용하는 신자들의 허방을 찌르는 통렬한 지적 아닌가.


성서에서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에 의해 빈번히 훼절되고 왜곡되었으며 또 불순종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의 산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 그렇게 꺾인 하나님의 뜻의 결과로 나타난 역사를 다시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만일 그렇다면, 전자의 뜻을 주관하는 하나님과 후자의 뜻을 담당하는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거나, 하나님이 어느 한계선상에서 무능하거나 변덕스럽다는 추론에 봉착한다. 바로 이런 논리적인 결과에 대한 신학적 당혹스러움이 무모한 변신론적 의도로 예의 정당화를 감행케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하나님 축복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에 담긴 문제와 구조적으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축복'은'복을 빈다'는 뜻의 어휘인데, 하나님한테 복을 빌어달라는 청원은 그 하나님 위에 더 크고 높은 신이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니 이 기도문은 신앙적으로 불경스럽고 신학적으로 모순된다.(기실 성서적 맥락에 의하면 축복은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또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다. 시편의 송축 언어는 모두 인간에 의한 하나님 축복을 의미하는 어휘들이다.)


이 불경과 모순을 합리적으로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앞의 이해 방식 또한 똑같이 문제 투성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희랍어 어휘는 'thelema'와 'boule' 둘이다. 전자는 개인의 인격적 '의지'와 '희원'의 의미가 강하고 후자는 보편적 '목적' '의도' '섭리'의 뜻이 강하다. 그 어느 쪽을 취하든, 하나님의 뜻은 철학적 운명론(fatalism)이나 결정론(determinism)과 다르다.


(9년 전쯤 내가 M.Div.과정으로 신학교 다닐 때 캘빈신학의 수업 시간에 이런 취지의 질문을 했을 때 John Burkhart 교수는 그게 그거라는 식으로 귀찮은 듯 답했다. 그는 틀렸다. 그런 무성의하고 틀린 걸 가르친 그 꼴통 선생이 죽기 전 부디 하나님의 계몽의 방망이를 통렬하게 한 대 맞길...)


하나님의 뜻은 명료하고 확실하다. 그것은 불의와 대치되는 정의이고, 잔혹과 냉담에 반대되는 자비이며, 구속과 억압에 역행하는 자유와 해방이다. 또한 그것은 불평등을 거스리는 해방이고, 폭력에 대항하는 사랑이며, 징벌을 대신하는 용서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자주 왜곡되고 침탈된다. 마치, 세례자 요한의 때로부터 천국은 폭력에 의해 침탈당한다고 예수가 말했듯이, 천국으로 표상된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온갖 폭력과 억압적 메커니즘 속에 훼손되고 침해당한다. 그래서 광야의 외치는 자의 고독한 목소리로 예언한 세례자 요한의 목이 달아났던 게 아닌가.


요컨대,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예정된 운명이나 사전에 결정된 각본대로,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지는 타율적 족쇄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동반 관계(covenantal partnership) 속에 인간의 자율적 결단과 참여로 이루어져 가는, 또 이루어져야 마땅한 역사적 과제이자 윤리적 목표라는 것.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 위의 뜻에 대한 발상은 변신론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무오류와 완벽성을 증거하기 위한 의도를 깔고 있는 듯하지만, 기실 인간의 죄악과 그 결과로 인한 책임을 하나님한테 떠넘기려는 음흉한 메타적 의도를 숨기고 있다. 아니면, 수동적 방기의 자세가 무반성적인 신앙생활에 인습화된 결과일 수 있다.


아, 이제 실감 난다.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실존을 무릅쓰면서, 독립적인 주체로 우뚝 존재하려는 용기가 무엇인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편리하게 남용하고 왜곡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필수조건인지.


물론, 이러한 비판적 구상들이 헬라적 신관과 히브리적 신관이 잡박하게 뒤섞인 성서적 신관의 모순점을 일거에 해소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수사학적 자위의 수단으로 오용하는 폐단을 반성하는 한 계기를 제공할 수는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