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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Aurelius] 페이터의 산문...

truehjh 2007. 10. 8. 22:39

 

사람의 칭찬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관(判官)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死後)의 칭찬받기를 바라거든, 후세에 나서 너의 위대한 명성을 전할 사람들도, 오늘같이 살기에 곤란을 느끼는 너와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戀戀)해하는 자는, 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하나가, 얼마 아니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억 자체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네가 장차 볼일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호머의 시구(詩句) 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阿喩者)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긴 자나, 모두가 다 한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 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 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느냐? 얼마 아니 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현존(現存)하는 것, 또는 인제 막 나타나려 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속히 지나가는 것인지를 생각하여 보라, 그들의 실체(實體)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 모를 시간의 심연(深淵)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괴로워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무한한 물상(物象) 가운데서 네가 향수(享受)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許與)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運命)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織女) 클로토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女神)이 너를 실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에는 때때로 그들의 분노와 격렬한 패기(覇氣)로 오늘까지 알려진 사람들 --- 저 유명한 격노(擊怒)및 그 동기(動機)를 생각하고, 고래(古來)의 큰 싸움의 성패(成敗)를 생각하라. 그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되었으며, 그들의 전진(戰塵)의 자취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먼지요, 재요, 이야기요, 신화(神話), 아니 어떡하면 그만도 못한 것이다. 일어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중대시하여, 혹은 몹시 다투고 혹은 몹시 화를 내던 네 신변의 사람들을 상기(想起)하여 보라. 그들은 과연 어디 있는가? 너는 이들과 같아지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네 육신과 영혼을 생각해 보라. 네 육신이 차지한 것은 만상(萬象) 가운데 한 미진(微塵), 네 영혼이 차지한 것은 이 세상에 충만한 마음의 한 조각, 이 몸을 둘러보고 그것이 어떤 것이며, 노령(老齡)과 애욕(愛慾)과 병약(丙弱) 끝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또는 그 본질, 원형(原形)에 상도(想到)하여 가상(假象)에서 분리된 정체(正體)를 살펴보고, 만상의 본질이 그의 특수한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을 생각해 보라. 아니 부패란 만상의 원리 원칙(原理 原則)에도 작용하는 것으로 만상은 곧 진애(塵埃)요, 수액이요, 악취(惡臭)요, 골편(骨片), 너의 대리석은 흙의 경결(硬結), 너의 금은(金銀)은 흙의 잔사(殘渣)에 지나지 못하고 너의 명주옷은 벌레의 잠자리, 저의 자포(紫袍)는 깨끗지 못한 물고기 피에 지나지 못한다.  아아! 이러한 물건에서 나와 다시 이러한 물건으로 돌아가는 네 생명의 호흡 또한 이와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天地)에 미만(彌漫)해 있는 대령(大靈) 영은 만상을 초와 같이 손에 넣고, 분주히 차례차례로 짐승을 빚어 내고 초목(草木)을 빚어 내고, 어린애를 빚어 낸다. 그리고, 사멸(死滅)하는 것도 자연의 질서에서 아주 벗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요, 그 안에 남아 있어 역시 변화를 계속하고 자연을 구성하고, 또 너를 구성하는 요소로 다시 배(配分)되는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변화한다. 느티나무 궤짝은 목수가 꾸며 놓을 때 아무런 불평도 없었던 것과 같이 부서질 때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있어 네가 내일 길어도 모레 죽으리라고 명언(明言)한다 할지라도 네게는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별로 다름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내일 죽지 아니하고 일년 후, 이년 후, 또는 십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도록 힘써라.

 

만일 너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니까. 너는 그것을 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일 죽음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외관(外觀)과 관념(觀念)을 사리(捨離)하고 죽음 자체를 직시(直視)한다면, 죽음이란 자연의 한 이법(理法)에 지나지 아니하고, 사람은 그 이법 앞에 겁을 집어먹는 어린애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 죽음은 자연의 이법이요,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을 돕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철인(哲人)이나 법학자(法學者)나 장군(將軍)이 우러러 보이면, 이러한 사람으로 이미 사거(死去) 한 사람을 생각하라. 네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볼 때는 네 조상 중의 한 사람, 옛날의 로마 황제의 한 사람을 생각하여 보라. 그러면 너는 도처에 네 현신(現身)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보라.---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대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네 자신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너는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職務), 너의 경영(經營)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머물러 있으라.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그 가운데 던져지는 모든 것을 열과 빛으로 변화 시키는 것과 같이, 이러한 세상의 속사(俗事)나마 그것을 네 본성(本性)에 맞도록 동화(同化)시키기 까지는.

 

세상은 한 큰 도시(都市), 너는 이 도시의 한 시민(市民)으로 이때까지 살아왔다. 아, 온 날을 세지 말며, 그날의 짧음을 한탄(恨歎)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不正)한 판관이나 폭군(暴君)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 온 자연(自然)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그를 고용한 감독(監督)이 명령하는 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자(作者)의 상관할 일이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너를 물러가게 하는 것도 선의(善意)에서 나오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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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터 페이터 (영국의 예술 평론가, 작가, 1839~1894)

: 지은 책으로는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 <르네상스 미술과 시에 관한 연구>, <쾌락주의자 마리우스>, <상상의 초상화>, <감상>, <플라톤과 플라톤주의> 등이 있다.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통해 심미주의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예술을 위한 예술' 옹호론은 심미주의에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