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Basecamp/Review

도서 - 세월 / 아니 에르노

truehjh 2023. 6. 19. 16:51

세월 /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과장 없이 그대로 기록하는 작가라고 한다. <세월>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나이 든 현재까지 60여년 동안의 기억을 나열하는 형식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1941년부터 2006년까지의 프랑스 사회의 시대상과 사건을 기록한 개인의 역사이며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집단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처음 접했을 때는 너무 낯설었다. 열다섯 장쯤 넘겼는데도 줄거리를 찾지 못해서 결국은 읽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2년이 더 지난 후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처음 느꼈던 편견을 간직한 채, 또다시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갔다. 2022년도 노벨문학상까지 탔다고 하는데, 나는 왜 그녀의 글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거리를 두고 찬찬히 읽으니 조금씩 읽혀지는 것 같긴 했다.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하지 않고 가볍게 읽기로 했다. 그렇게 쉬엄쉬엄 읽으며 2/3 지점에 도달해서야, 드디어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의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 동시대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일 것이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긴 시간에 걸쳐 읽었던 <세월> 근현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의 솔직담백한 자전의 이야기다. 아니 에르노는 그녀가 경험한 세계와 그녀에게 기억될만한  사건들을 그녀의 가치관으로 자질구레한 일상이나 시대적 환경을 기록해 놓았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읽으면서 어머니들의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으로, 한 시대를 살고 있는 단독자로서의 한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삶에서 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장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만의 특이한 경험인지 또는 일반적인 여성의 이야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정치적인 성향, 가족관계에서 느끼는 감정 등을 공감할 수 있겠는데 성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전혀 체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그토록 그녀에게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모든 여성에게 해당된다고 한다면, 내가 오히려 더 특이한 삶은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물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 더 이질감과 괴리감이 컸다. 동시대와 동지역을 살았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까? 아니면 역사와 문화와 정치 상황을 뛰어넘는 보편의 인간사라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세월>의 뒷부분에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그녀의 시간이었다. 모든 기록 속에서 크로노스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섬세하게 파헤치려는 의도가 보였다. 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며 살았다고 한다면, 그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온전히 기록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책 속에서 **

p09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p56 질문할 권리는 선생님에게만 있었다. 단어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었다. 우리는 엄격한 규율에 제약을 받으면서 갇혀 있는 것을 특권으로 알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사립학교들은 그들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교복을 강요했다.

 

p94 그녀는 미래를 위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1) 날씬해지고 금발 머리가 되는 것, 2) 자유롭고 독립적인,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밀렌느 드몽죠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보며 꿈꾸기.

 

p109 점점 빠르게 등장하는 것들은 과거를 밀어냈다. 사람들은 용도를 묻지 않고 단지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으며, 당장 그것의 값을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했다.

 

p111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p112 우리는 피임약으로 인생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육체로부터 그토록 자유로워진다는 것, 남자만큼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p113 세상의 청춘들은 폭력으로 그들의 안부를 전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분노해야 할 이유를, 마오쩌둥의 백화제방 백가쟁명에서 꿈꿀 이유를 찾았다.

 

p121 그녀가 진짜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녀가 혼자 있을 때나 아니와 산책할 때 찾아온다. 그녀에게 진짜 생각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 옷을 입는 방식, 유모차를 배려한 인도의 높이, 장 주네의 병풍들 공연금지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닌, 그녀 자신에 대한 질문들, 존재와 소유,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p224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그녀> 사이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