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도 해지하고, 풍족한 삶과 부족함이 없는 삶의 차이
어제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가 속절없이 TV 리모콘을 찾아 여기저기 눌렀다. 봄 계절의 옷을 판매하는 홈쇼핑에 눈이 머물렀는데, '돈을 아껴써야 하는 시기'임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저 옷 하나도 못사랴'라는 괴팍한 심보가 올라와 마음과 정신이 혼돈스러워졌고, 급기야는 자켓과 티셔츠를 몇 개 구입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계속 잠이 오지 않았다. 쓸모없는 결정을 내렸다는 자괴감과 옷을 입고 나갈 기회조차 없다는 우울감과 노인이 입을만한 디자인이 아닌 것 같은 낭패감이 몰려와 눈은 더욱 말똥말똥해지고, 머리속은 점점 더 뜨끈뜨끈해져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 내내 명쾌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만 아작내고 있다. 아직도 내 나이와 내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서글퍼서다. 필요할 것 같은 옷 하나 선뜻 구입하지 못하는 상황이 껄끄러워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칠순 예배 때 축하해 주러 오신 목사님들이 나에게 주신 메시지는 공통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내 현실의 삶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이란 과연 가능할까, 주머니에 가진 것이 없고, 옆에는 사람이 없다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불평하며 살면서 같은 입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으니까 부족함이 없는 삶이라고 나를 세뇌해야 할 것인가.
나는 60세가 될 때까지도 앞날만 그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 뒤만 돌아보며 살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1~2년 전이다. 지금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지나간 시간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다음 거처로 가기 위해 그 흔적들을 버리고 있다. 초간단 미니멀라이프를 실현하기 위해서 계속 정리하면서 버리고 있지만, 버리는 것 못지않게 새로 구입하는 것도 한두개가 아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해서 소모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생명이 있는 한 사고, 쓰고, 버리는 일을 계속될 것이고, 나는 계속 곤혹스러워 할 것이다.
정리하고 버리고 비우는 작업을 시작했을 때 가장 고민이 되었던 것이 100살까지 보장하는 실손보험해약이었다. 1년 이상 고민 끝에 며칠 전 실손보험을 해지했다. 12년 전에 가입했는데, 3년마다 갱신되는 금액이 생각보다 많아서 감당하기가 점점 어려워져서다. 12년이 넘도록 보험금을 활용해 본 적이 없는데 꼬박꼬박 달마다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되었다. 저축성이 아니라서 해약해도 찾을 돈이 얼마되지도 않으면서, 앞으로 8년을 더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결국 담당자에게 통보했는데,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의 고객 중에서 ‘10여 년 동안 가입하고 있는 실손보험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며 돌려주는 액수가 너무 적어서 미안하단다.
보험을 활용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하는지, 돌려받을 수 없어서 손해 본 많은 금액을 억울하다고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제부터 사용할 일이 많아질 텐데...’라며 한마디 하는 남동생 말대로 노화된 몸이 어떤 방향으로 튈는지 몰라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산 것처럼 스스로 자신을 돌보며 사는 데까지 사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던 일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하지 못한 일도 별로 없다. 가지고 있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가지지 못한 것도 별로 없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논리로 풀어보면 간단하다. 부족함이 없는 삶이라는 말이 맞는다. 그러나 풍족한 삶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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