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Trip/의료선교

한국 의료선교의 개관(2)

truehjh 2008. 12. 23. 18:46

 

3. 선교병원의 현대화 (1904-1910)


1) 현대식 병원건물 신축 : 미국 북장로교의 경우 부산 전킨기념병원(1904), 서울 세브란스병원(1904), 대구 메리롸이트기념병원(1904, 1906), 선천 미동병원(In His Name Hospital, 1905), 평양 래드기념병원(1906), 재령 재령병원(1908), 강계 계레지병원(桂禮知, 케네디,1910), 청주 덩컨병원(1912)을, 남장로교는 군산 앳킨슨기념병원(1906), 북감리회는 서울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1912), 남감리회는 개성 남성병원(아이비기념병원, 1908), 영국 성공회는 진천 애인병원(1909), 호주장로회는 진주 배돈(培敦, 페이튼병원, 1913) 등을 완공 혹은 건축 중이었다. 실로 1904년에서 1913년 10년 동안에 13개의 현대식 벽돌로 건물을 신축하고 현대화된 설비를 갖춘 병원을 개원하였다.


2) 의료의 전문화 - 연합의료기관 세브란스의 설립

- 1899년 설립추진, 1904.9.3 제중원은 세브란스의 지원으로 세브란스 병동 신축 이전


3) 의학교육의 체계화와 한국인 의료진의 역할증대

- 1907년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 배출(체계화된 의학교육)

- 간호사 양성 : 보구녀관에서는 1906년, 세브란스 간호원양성학교는 1908년에 학생간호원에게 가관식을 거행하였고, 세브란스는 1910년에 제1회 졸업생을 내었다.


4) 전도사업의 체계화

- 병원전도가 한국인 전도인과 전도부인을 통해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

특히 입원환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주병원의 경우는 입원환자의 90% 정도가 개종


4. 일제의 탄압속의 의료사업 확대 (1910-1924)


1) 역사적 배경 : 총독부의 탄압

- 세브란스 졸업생은 별도의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의사면허 발급(1919년 이후 해제)

-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일제의 의사 면허 시험을 통과하여야 한국 내 의료활동을 하게 함(1923년 해제, 그러나 그후 다시 면허시험을 보게 함)

- 1909년 일제는 의병탄압을 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설립한 군인병원을 관립자혜의원으로 전환, 전국 각도에 확대/ 서울에는 대한의원을 <총독부 병원>으로 개편 확대


2) 선교부의 의료정책 : 위기와 확장정책

1910년 현재 관립병원 14개, 일반개인병원 126개 등 일반병원 140개, 선교병원 29개로서 병원수에서는 선교병원이 전체의 20%에도 못 미쳤다. 또한 이후에 관립병원과 일반사립병원의 증가율은 기독병원보다 앞섰다.

- 선교병원의 위기 : (1) 일제의 식민지적 병원정책에도 불구하고 관립병원은 무료진료환자의 비율에서 선교병원보다 높았고, 의료진과 건물, 설비도 우세 (2) 병원사업이 선교에 기여하는 비중이 감소/ 선교병원의 폐지론이 1910년대 초에 대두

- 전도에 기여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의료사업은 기독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으로써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정해짐

- 의료진의 보강과 의료시설의 전문화 추진(병원당 2명의 의사와 1명의 간호사 체제 추진) : 1919년 20명의 의사에서 1922년 36명으로 거의 2배의 의사 보강

- 의료사업의 확장 : 1918년까지 병원(진료소가 아니라)이 31개까지 확장.

- 종합병원 세브란스를 "미국병원들과 동일한 수준"까지 의료의 질적 수준 향상 추진. 1913년부터 선교기관 연합으로 운영

- 이 시기가 한국의료선교의 황금기


4) 특수 의료 선교사업의 추진

- 나환자 사업 : 1910년 호주 장로교회가 부산진 상애원 사업시작, 남장로회의 광주나병원(1911년 설립), 북장로회의 대구나병원(1915년)

- 농맹아 유아복지사업(1916년부터 시작) : 우량아선발대회, 어머니 반 조직 육아법 교육


5. 시련 속의 선교병원 현상유지정책(1924-1940)


1) 선교부 의료정책 - 의료선교사의 감축, 한국인 의사들이 병원 책임 맡음

2) 세브란스와 한국인 의료진의 역할 증대 - 세브란스는 1940년까지 910명의 의사를 배출, 당시 한국인 의사가 1,918명이었으므로 전체 의사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의사는 세브란스를 통해 배출되었다.

3) 공중보건교육 사업의 계속 : 사경회와 학교에서 위생강의, 공중보건 소책자 배포

5) 특수사업

- 나환자, 유아보건 사업 계속

- 결핵사업 개시 : 매년 5만명이 결핵으로 사망, 교통, 이동성의 증대로 감염율 증대

- 1920년, 세브란스 구내에 최초의 결핵병동 일시 설립. 1932년, 크리스마스 씰 발행사업(모금 및 폐결핵 진단 치료 계몽활동)


6. 암흑기 (1940-1945)


1940년 160명의 선교사들이 철수, 의료선교사들도 강제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