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같이/Health Tech

수영(4) - 기분 좋은 하루

truehjh 2012. 5. 26. 10:05

 

  커다란 가방 하나 들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집을 나선다.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상쾌하다. 가방 안에는 수영복, 물안경, 세면도구가 들어 있다. 내가 이런 운동가방을 들고 수영을 배우러 다닌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어느 날 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쳐 다닐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 한 조각이 부럽지 않다.


  수납장의 번호표를 받아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주 보는 얼굴들이 있다.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주저함 없이 옷을 벗는다. 다리 하나를 지탱하고 있는 긴 보조기도 벗는다. 마음속에 겹겹이 두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옷마저 다 벗어 버린다. 타인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 왜곡되어 있고, 균형 잡히지 않고, 서로 다른 길이와 굵기를 가진 나의 두 다리가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다. 순간이지만 자유로움이 내 몸 속을 파고든다. 짜릿하다. 샤워장에 준비되어 있는 휠체어로 옮겨 앉으면 미끄러운 바닥이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어도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배려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권리의 차원에서 누리는 당당함이 더 기분 좋은 감정이다. 자유인이 된 기분이다


  수영은 나이 들어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좋은 운동이라고들 하지만 선뜻 수영을 선택할 수 없었다. 옷을 벗은 상태에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지막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마도 일반 수영장에 갔더라면 남과 다른 나의 몸을 드러내기가 몹시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인해 주눅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싫어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이곳이 재활스포츠센터 안에 있는 수영장이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적어도 맘 놓고 장애인을 차선 혹은 차차선으로 대하는 태도는 없다. 그렇다고 장애인 우선의 대우를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피해를 주는 행동인 것 같아 망설여야 하는 찰나와, 기회를 주는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피하고 싶을 뿐이다.


  장애인을 위한 스포츠센터가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장애인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자기 동네에 있는 재활스포츠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온다는 말이 부러웠었다. 물론 내 나라에도 특별한 센터가 한두 개 존재했겠지만 보편화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도 장애인을 위한 스포츠센터가 있다. 그것도 가까운 곳에 깔끔하고 좋은 시설을 갖춘 센터가 있으니 금상첨화다. 더군다나 운동할 때에 장애라는 조건들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선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대답과 조언을 들을 수 있으니 그 역시 감지덕지다. 속이 시원하다 못해 뿌듯하기까지 하다.


  재활스포츠센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패럴림픽의 경기종목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운동이 비장애인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여가활동뿐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도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저 운동이란 먼 산의 풍경이고 잡을 수 없는 바람이었다.


  운동의 필요성은 나이 들면서 더욱 절실해졌지만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운동이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복잡한 보조 도구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 거의 없었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특히 수영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물에 몸을 맡기고 떠 있으면서 태고의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60년 가까이 고생한 육체가 물의 위로를 받으며 호사를 누린다. 물 속에서 숨을 내쉬면 뽀글뽀글 공기방울 소리가 정겹다. 거센 저항 없는 부드러움과 함께 아기처럼 놀아 본다.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이 충전되고 있다. 아주 생소한 변화다.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심신의 자유로움이 또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공기거나 물이거나를 상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을 대처할 수 있게 되었듯이, 언젠가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때가 오리라. 아니 구별할 필요가 없는 때도 오리라. 모든 차별들의 경계가 허술하여져서 그 경계를 넘나들며 까탈을 부리지 않게 되는 때 말이다. 세상은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갈 것이고, 난 내일도 당당하게 옷을 벗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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