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장년시대(2008~2019)

e시니어진입기 - 57세... 갱년기 후유증

truehjh 2012. 6. 13. 22:02

57... 갱년기 후유증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도 있고, 나잇값을 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나이는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나는 종종 나이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곤 한다. 지나간 날에 대한 적당한 기준점을 찾지 못할 때 특히 그렇다. 첫사랑을 시작했던 나이, 다리를 고치로 수술실에 들어갔던 나이, 처음 취직했던 나이, 약국을 개업했던 나이, 독립을 선언했던 나이 등을 기억해 내면 앞뒤의 사건이 잘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년도보다 나이로 환산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집안의 대소사를 준비하거나, 상상 속의 과학적 가정이 현실화되기를 기대할 때도 내가 몇 살이 될 때쯤 일어날 일인가를 계산해보면 예측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삶을 되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나의 20대는 그리고 3~40대는 어떠했던가. 그렇게 기준점을 잡으면 쉽게 추억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이는 50대에 진입하기 전까지인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하고 분석하면서 미래를 계획했고,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고. 무엇인가에 대해 불같은 화가 일기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인 줄 알고 그렇게 살았다. 50대 초반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갱년기를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경험한 갱년기 증상은 이성의 조정이나 감정의 통제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육신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잘 조절되어 유지되던 신체의 리듬이 깨지면서 여기저기 고장의 신호가 왔다. 심장의 박동이 제 마음대로 박자를 벗어나고, 눈의 근력은 힘을 잃어 시야가 불분명하고, 관절과 뼈들이 아프고, 치아가 흔들리고, 온갖 호르몬들이 균형을 잃었다. 몸이 말을 안 들으니 마음도 따라서 제멋대로 흘러가는 모양새였다. 조바심이 났다. 소명, 삶의 목적, 가치, 의미 등등의 단어들이 다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각이 멈춰서는 것 같았다. 삶의 에너지가 하향곡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치는 것 같아 불안했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혹독한 갱년기의 연장선이었겠지만 몸과 마음이 현격하게 변화되어 삶이 후퇴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나이는 55세 전후다. 물론 나의 경우다. 한바탕의 축제가 끝난 후 널브러져 있는 파편들을 보는 듯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오장육부의 장기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젠 수리하고 교체하면서 다독이며 조절해 가며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당분간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기간으로 삼고 건강 이외의 잡다한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삶을 반성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시간 보내지 말고, 미래를 계획하느라고 쓸데없이 애쓰지 말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며 현재에 만족하자고 나를 다잡았다. 뒤돌아보며 뉘우치거나, 내일을 계획하며 소망할 여유가 없었다.

 

병원을 찾아가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방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운동과 취미활동을 시작했지만 눈에 띄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거의 칩거 수준의 시간을 보내면서 한두 해를 더 지내는 동안 몸뿐만 아니라 마음 역시 점점 더 나약해져 갔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부초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도, 노력하지 않은 것도, 계획하거나 시도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계획하면 깨지고, 시도하면 부서지고, 다시 노력하면 바라지 않았던 결과로 돌아왔다. 그래서 또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무의욕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겪으며 지냈다. 갱년기의 후유증은 막바지에 이른 것 같고, 바로 앞에는 노화가 기다리고 있다.

 

갱년기가 끝나면 인생의 중년기가 이미 지나갔다는 신호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갱년기 증후군이라는 과정이 어느 한 지점에서 완전히 정지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숫자적인 나이로 여기까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기간을 거치면서 몸 전체가 변화되어 노화로 진입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인생에서 살아온 경험과 전문성의 경력으로 가장 강력한 파워를 내뿜을 수 있을 나이에 갱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 멈춰 서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연의 순리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