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고등학생과 예비 노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중학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고등학생이 되는 도토리는 지금 자기 방의 책상 정리가 한창이다.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책들과 앞으로 필요 없을 자료들은 모두 버리면서 책꽂이의 빈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버려진 책들은 큰 박스 안으로 들어가고, 사용하다 남은 온갖 문구들은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간다. 고등학교에 가서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분류된 물건들이 가차 없이 버려진다.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는 비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무의식적으로나마 깨닫고 실행하는 것 같다.
한편,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예비 고등학생 옆에 기억을 정리하는 예비 노인이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노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버리자’는 것이 예비 노인인 내가 실천해야 할 일이다. 지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선택하고 시도했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버리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버리는 것은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롭게 지금 이 순간을 살고,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 나의 짐을 좀 가볍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버림과 비움으로 또 다른 삶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버릴 것과 남겨야 할 것,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다.
버려야 할 것들 또는 잊어야 할 것들은 나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기준이나 불필요한 습관들, 시간을 낭비하며 세웠던 과한 계획들이다. 그것들은 내 몸에 맞지 않는 허례허식이거나, 실천하지 못할 욕심이었다. 형이상학적인 무형의 것들뿐만 아니라 유형의 것들도 마찬가지다. 주위를 둘러보면 버리겠다는 결정을 계속 유보하면서 그냥 쌓아 놓은 것들이 많다. 누구에겐가 선물로 받은 물건들, 감동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브로셔나 도록들, 언젠가 필요할 것만 같은 문구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작은 소품들 등 각별한 사연이나 추억이 담긴 것들은 매번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했다.
특히 심한 갈등을 일으키곤 했던 것은 조카 도토리가 직접 만들어 준 갖가지 선물들이다. 예로 오래된 연필꽂이가 있다. 이 연필꽂이는 토끼 두 마리가 손잡고 다정하게 서있는 모습이 앞면에 배치된 지점토 작품이다. 그 안에 담겨있는 것들은 사과 달린 연필, 꽃 달린 볼펜, 리본으로 만든 꽃 등 모두 어렸을 적에 도토리가 직접 만들었거나, 그녀의 정성이 듬뿍 담겨있는 잡동사니들이다.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매일 내 책상 위에서, 내 눈 앞에서, 나와 함께 지내던 물건들인데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지점토로 붙인 토끼 다리가 하나 떨어져 나가고, 먼지가 달라붙고, 색이 바랬다. 연필꽂이, 오늘은 너의 차례다! 이번엔 기어이 버려야겠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스며있어서 버리면 그녀가 좀 아쉬워할 것 같아 망설이는 것은 단지 내 마음일 뿐일 수도 있을 테니까.
사실 모두 버리고 잊어야 하는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겨야 할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은 분명하게 가려내야 한다. 그중에 그녀와 함께 수업을 하면서 느꼈던 행복한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남겨두고 싶다. 내가 하고 싶던 그림을 그리며 보내는 시간보다, 내가 좋아하는 바느질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보다, 영어수업을 매개로 하여 자라나는 조카아이와 함께 소통하고 지냈던 시간들이 더욱 값지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었다는 것이 보람이 아니고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이 행복이고 보람이었다.
자라나는 도토리를 옆에서 바라볼 수 있고 삶을 나눌 수 있었음이 감사하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세상이, 그 순간이 행복임을 깨달으며 내가 노년의 삶을 준비하는 시기를 맞이하듯이 이제 도토리도 곧 고등학생이 되어 그 또래와 이어지는 삶에 충실하면서, 서로 다투고, 화해하고,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를 맞을 것이다. 새로운 이웃과 잘 지내며, 서로에게서 배우며, 서로의 삶에 활력을 주면서 함께 나아가는 훈련, 그런 배움의 시간들을 그녀가 잘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제자가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선생님이 되면서 용감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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