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생
중학교 3학년인 도토리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다.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20분만 자고 나서 다시 시작하겠다며 시간이 되면 깨워달라고 한다.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는 아이를 보니 너무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고 있는 아이와 함께 공부해 본 사람은 그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것이다. 한창 자랄 때에 졸음을 참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친구들과 신나게 놀면서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할 이 시기에, 미래를 꿈꾸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기에도 모자랄 이 시기에, 과외로 학원으로 다니며 주입식 지식을 쌓아가야 하는 아이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20분이 지난 후 도토리를 깨웠다. 아이는 빨간 눈을 번쩍 뜨면서 씨익 웃는다. 잠시 정신 나간 듯이 앉아있더니 찬물로 세수를 하고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기특한 마음에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 반이 넘었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기말고사를 치르고 온 날, 너무 황당한 영어 점수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겨울방학 동안 영어의 기본을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비효율적인 공부 방식을 개선하고 스스로 터득하도록 훈련시키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처음부터 긴 기간 동안 가르칠 의도는 전혀 없었다. 3개월 정도만 개입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청하여 도토리의 독선생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영어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도토리도 예외 없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어공부를 해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영어연극의 주인공까지 맡아서 할 정도로 영어에 관심과 흥미가 많았다. 영어로 노래하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특히 발음이 좋다고 칭찬을 받곤 하던 그녀가 중학교에 올라가서 갑자기 바뀐 영어공부 방식 때문인지 영어울렁증에 걸렸단다. 단어가 생명이라고들 하는데 도토리는 단어를 외우는 시간만 되면 머리가 아프고, 토하고 싶고, 급기야는 열이 나는 등 몸으로 증상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영어울렁증 벗어나기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뭐든지 잘한다고 치켜세워주었다. 두 번째 목표는 영어선생님이 해주는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수준의 문법 익히기였다. 그 정도면 별로 어렵지 않다는 확신을 심어 주면 된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도토리의 영어공부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었다. 1960년대식의 발음으로 요즘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미 발음을 익힌 후의 중학영어는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어를 배울 때 죽어라고 공부했던 것이 문법과 독해 아닌가. 그렇다고 무작정 내가 배운 방식으로 가르칠 요량은 아니었다. 아주 쉬운 영어 동화책을 선택해서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몇 가지 문법 용어와 동사의 성격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다 아는 내용이라 쉽게 해석할 수 있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영어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다 지나고 새 학년이 되었지만 그 아이에게 맞는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학원이나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중2가 지나고 중3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치게 되었다. 영어성적은 중1 때보다 중2 때가, 중2 때보다는 중3 현재의 성적이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그나마 고무적이다. 혼자서 그리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 단계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야 하고, 그 필요성이 절실해져야 공부가 되는 것이니까.
그녀의 영어성적과는 별도로 독선생으로 함께 공부해온 지난 2년간의 시간들은 나에게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매일매일 또는 1주일에 3~4일씩 한두 시간 이상을 도토리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런 규칙이 나를 더 성실하게 만들고, 늘어져있는 내 시간들을 조리 있게 계획하게 만들고, 아이와의 공감을 위해 좀 더 긴장하고 공부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영어공부를 핑계로 학교생활, 친구관계, 선생님 이야기 등등을 전해 들으며 그녀의 삶을 공유할 수 있어서, 고모이면서도 독선생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었던 최고의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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