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진다고 하길래 겨울 이불을 꺼냈다. 십년 정도 겨울마다 꺼내 덮던 두꺼운 솜이불이다. 큰 이불의 무게감이 몸을 더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아 가장 추운 겨울 기간에만 사용하고 있다. 너무 커서 혼자 하기가 힘들어 낑낑대다가 엄마 생각을 했다. 손질할 때마다 엄마가 그리워질텐데 언제까지일까. 그날도 새로 바꾼 호청의 뽀송뽀송한 느낌을 기대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져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엄마도 연세가 드신 후에는 가볍고 얇은 이불을 여러겹으로 덮고 주무셨던 것 같다. 겨울, 솜이불, 엄마, 그리고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잔가지들 때문에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 화장실을 두 번씩이나 다녀와도, 크게 소리 내어 숨쉬기 운동을 해봐도, 수없는 별을 세어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답답해서 TV를 켰다. 심야에도 방송은 계속되고, 여기저기서 홈쇼핑 광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TV를 끄고 다시 잠을 시도해 보았다. 세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잠이 올 기미가 없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롱패딩코트, 스웨터, 밍크, 기모바지, 고구마 등 등... 난 훈제 치킨에 딱 꽂혔다. 더듬더듬 돋보기를 찾아 쓰고, 스텐드 불을 켰다. 신용카드 번호가 필요할 것 같아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놓고, 화면에 나오는 자동 주문 번호를 눌렀다. 사실 컴퓨터화면에서 인터넷주문을 사용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TV에서 홈쇼핑 하는 것은 처음이라서인지 생소했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ARS로 연결되는 줄 알았는데 상담원이 연결되었다. 이런 시간에도 상담원이 실시간으로 안내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생년월일을 듣더니 갑자기 목소리의 속도가 느려지고 낮아진다. 카드등록하고 여러 절차를 밟아 주문을 완료했다. 한밤중의 홈쇼핑에 성공했다.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고르고 현금으로 구입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현금 대신 카드로, 시장에 나가는 대신 컴퓨터로, TV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해서 다채로운 방법으로 변화의 물결이 몰려왔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필요한 물건 하나 구입하기가 어려워진 시대에 들어섰다. 며칠 전의 일이다. 나모 모임이 있어서 합정동에 갔다가, 시간이 늦어 해님 집에 가서 잤다. 오랜 친구라서 먹고, 자고, 쉬는 것이 내 집만큼 편하게 느껴진다. 주일에는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오는 전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갔다. 전철 타기에는 좀 이른 시간으로 점심시간이었다. 시간도 좀 보내고, 점심도 해결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역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갔다.
평소에 익숙한 치킨 맛을 찾아 K**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장 안을 살펴보니 좌석수는 많은데 손님들은 별로 없었다. 듬성듬성 혼자 앉아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노인이 두세 명이 보이고, 젊은이들이 한 두 팀 모여 앉아 두런거리고 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간이 아닌가 보다. 손님들이 많지 않아 매장은 한가해 보였고, 공간은 여유로웠다. 주문받는 곳으로 쭈욱 걸어 들어가 두리번거리고 서 있어도 직원이 눈을 마주쳐 주지 않는다. 그 앞에 서서 조금 기다렸지만 말 걸어줄 분위기가 아니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대답은 무인 오더기를 사용하라는 말 한마디였다. 직접 주문하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현금만 가능하단다. 주문이 밀려서 바쁘다면서 돌아서는 직원에게 나도 한마디 했다. 주문하지 말라는 이야기네요. 초보 꼰데의 꼬장이 어설펐는지 빤히 쳐다보는 직원을 뒤로 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그렇게 나오면 나만 손해지만 거기서 돋보기 꺼내 오더기 앞에서 어물쩡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무인 오더기를 처음 시도하는 게 부담스러워 그랬는데 꼬장질이 되어버렸다.
햄버거는 B** 입맛인데 없어서 별로 안 좋아하는 맛을 내는 L*** 패스트푸드점으로 갔다. 이번에는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 여기는 입구에 오더기가 있어서 직원한테까지 가지 않고 무인오더기로 먼저 갔다. 친절하게도 직원이 다가와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용감하게 아니라고 하고서는 천천히 시도해 보았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으면 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줄서 있는 사람도 없으니 여유 있게 찬찬히 살펴보면서 내 맘에 드는 햄버거와 커피를 주문하여 먹었다. 성공했다. 먹고살기 참 힘들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의 '2017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평균을 100%로 봤을 때 70대 이상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25.1%로 현저히 낮았다.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되고, 소외된다. 각종 훼밀리레스토랑, 영화관과 대중교통은 물론 시장이나 편이점 등 일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곳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노인혐오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는, 그 대상에 대한 ‘자기 불안’이다. 손수레를 끌며 폐지를 줍는 노인, 갈 곳 없이 우대권으로 지하철 여행을 하는 노인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젊은 세대의 자기 불안이 혐오로 발현된다는 일종의 ‘노화공포증’이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노년을 긍정하지 않고, 오직 불편함과 쓸모없음으로 늙음을 정의해온 사회의 단편이다.”라고. 세대갈등과 노인혐오는 개인적인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극복하는 제도적인 문제로 접근해서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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