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세... 정체성의 재확립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체로 위기상황에서 제기된다.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스럽게 자아에 대한, 삶에 대한, 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 없고 수입이 줄어든 독거노인(?)을 염두에 두고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씨름해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질문해 본다. 특히 제도적인 노인의 나이를 향해가는 지점에서 ‘독거와 노화’라는 위기상황을 앞에 두고 보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심각하게 나를 일깨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위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독거와 노화가 위협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 단어들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험요소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뭉뚱그려 분류해 보면 크게는 건강과 경제의 약화이고, 조금 작게는 사회적 관계망의 축소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체성의 재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인간은 타인이 해석하는 대로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타인이 해주는 칭찬이나 비평이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다. 특히 어렸을 때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주변 사람과 상황이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나는 자아가 단단해지기 전에 부모님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라 나 스스로를 규정지으려고 노력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주입된 상태로 성장했기에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어야 하는 줄 알았다.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내가 꿈꾸어야 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챙기고 나 자신의 일가를 이루어 독립해 나가는 단독자로서가 아니라, 속해있는 가족이나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하며 살고자 했다. 주체적인 자주성을 가지고 삶의 주연을 꿈꿔야 했는데, 조연으로 남겠다고 내 정체성을 자리매김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성숙한 후에는 맘대로 나 자신의 삶을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쉽지 않았다. 독립된 존재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하려는 의존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 내가 내 삶을 살고자 마음먹은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가족관계 속에서의 내 위치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엄마가 계실 때까지는 내가 기여할 가족과 이웃이 있어서 살아온 그대로 살아도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안 계시니 나에게 의미가 되는 가족과 이웃이 주변에 별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가정을 이루지 못한 상태로 나이가 들었다는 것과 이제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건강과 경제 문제가 악화되고 외로움 또한 가중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의존적인 태도로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처하기 힘겨울 것이 자명하다.
일찍부터 가족 만드는 로망을 포기하고, 생애비혼자라는 독립된 정체성을 가지고 용감하게 살았어야 했다. 여성 1인 가구로 정착시키고 주체적으로 삶을 꿈꾸고 계획했더라면 이리도 오랜 세월 동안 혼란을 거듭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용기 없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100세를 향한 장수시대가 다가온다고 하는 마당에 후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 아예 생각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60대 중반이라는 시기는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를 삶의 전환점으로 만들어 특별한 의미를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시니어기로 접어든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정체성의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늦었지만 의존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삶의 방향을 바꾸고 나 자신의 독립된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싶다. 주체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즐길 줄 아는 마음가짐이야말로 독거와 노화라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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