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장년시대(2008~2019)

e시니어진입기 - 기록하는 사람

truehjh 2019. 4. 6. 15:30

기록하는 사람

 

지난날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를 누구에게라도 설명할 수 있는가? 현재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누구에게라도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하는 것이 망설여진다면, 아니 설명할 수 없다면 나에 대한 질문은 계속되어야 하고 또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에 대한 질문,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즐거워하느냐는 질문이고, 내 삶의 내용 중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를 지탱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최근이 되어서야 나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긴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기록하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곱씹어보는 것을 즐거워한다. 내 삶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일은 일기를 쓰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작업이다.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콘텐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아주 오랫동안 내 손에서 떠난 적이 없는 작업이 기록하는 일 즉 글쓰기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는 일기, 누군가와 지속해서 주고받은 편지들, 읽은 책, 본 영화, 다녀온 전시회나 감상회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적어 놓은 노트, 짧은 생각들을 정리해 보고 싶어 써놓은 몇 가지 수필들, 순간의 감상들을 놓쳐버리기 안타까워서 끄적거려 본 여러 장의 메모들, 다양한 SNS에 올려놓은 글들 등 내 글쓰기 작업은 다양하다. 나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글들이지만 그 글들의 독자가 되어 보면, 기록된 글이 바로 내가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일들의 흔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진 나의 글쓰기 형식이 시나 소설 등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인생에서 느낀 것들을 시시콜콜 기록하고 있다는 점 하나일 것이다. 누구나 다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누구나 다 느껴 보았을 것이고, 한 번쯤은 시도해 보았을 것들을 기록한다. 부끄러운 것들은 물론이고, 혹시 치부일 것 같은 사실들이 한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솔직하게 기록해 나간다. 그것이 다를 뿐이다.

 

다행히 기록하는 행위는 나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 중의 하나이며, 내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가장 멋진 작업이다. 혹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고가 되는 기록이었으면 좋겠고, 누구에겐가 힘과 용기를 주는 기록이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반면교사로라도 삼을 수 있는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쓰기를 이어간다. 그러다가 가끔은 나의 글쓰기에 대한 한계가 느껴져 답답해질 때가 있다. 공감을 얻기 어려운 나만의 언어인 것 같아 힘이 빠질 때도 있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글을 계속 쓰고 있는 것 같아 절망스러울 때도 많다. 혹 가다 누군가가 긍정적인 평을 내놓으면 갑자기 힘이 나기도 한다. 글 전반에 걸쳐 은은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정신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댓글 한마디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이 없어도 괜찮다. 내가 내 삶의 기록을 읽으며 성찰할 수 있으면 된다. ''라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책이고 가장 큰 위로를 받은 것이 글이다. 사춘기가 지날 무렵 러시아 근대문학 특히 도스토엡스키에 광분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영성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나를 매료시켰다. 그 당시 줄을 그으며 읽었던 책 속의 글들이 나를 키우고 내 사고를 확장시키는데 일조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페이터의 산문도 그랬고, 루이제 린저, 마틴 부버, 본 회퍼, 폴 틸리히, 도르테 죌레, 레비 제커라이러스의 기록들이 그랬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과 더불어 내 인생을 이끌어준 멋지고 훌륭한 기록자들이다. 또 한 가지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것은 아버지의 일기다. 북한이 고향이신 아버지가 남쪽으로 내려오시면서 시작한 일기에는 25세의 청년의 삶부터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교육하고, 목회를 마무리할 때까지의 일상이 시시콜콜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방 책꽂이에 꽂혀있던 금기의 파일들. 돌아가시고 나서 읽어보니 구구절절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기록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글로 남은 기록은 이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소중한 유물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간 것 같지만, 바로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 바로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글쓰기는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큰소리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점은 기록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지속적인 독서가 필요하고, 사고하는 지구력이 필요하고, 강한 체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허리의 근력이 필요한데 쉽지 않다. 이 모두가 나이라는 육체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를 위해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고 운동하는 일 또한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야 최소화된, 아니 어쩌면 유일한 희망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시니어로 진입하고 나서도 정신력을 사용할 정도의 기력이 남아있어서 그림 있는 기록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멋진 일이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