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There/우리나라

2022-10(18) 제주도 : 따로 또 같이

truehjh 2022. 11. 30. 20:19

2022.10.24.()

 

440분 기상, 540분 공항 도착. 같이 제주공항까지 왔지만 항공사는 따로 이용해야 한다. 동생네는 아시아니 첫 비행기고, 나는 대한 항공 첫 비행기다.  이번 여행은 '따로 또 같이'의 연속이다.

 

이른 아침 공항 안은 썰렁했다. 아시아나는 영업을 시작했는데, 대한항공은 아직 직원이 출근 전이다. 수속을 마친 동생네는 미리 들어가고, 나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발권 때문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6시가 되니 직원이 나와서 안내를 한다. 바로 친절한 휠체어서비스를 받아 편하게 게이트 앞으로 들어왔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돌아다니기가 불편해서 작은올케에게 전화로 선물 부탁을 하나 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짐 찾는 데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6 40분에 대한항공 탑승. 제일 먼저 비행기에 오르고 맨 나중에 내리는 것은 휠체어서비스 받는 사람의 기본 상식이다. 김포공항에 착륙한 후에 비행기가 움직이고 있는데 막무가내 노인이 승무원에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고집을 부리며 왔다 갔다 한다. 휠체어서비스를 받은 아내와 함께 먼저 나가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움직이지 말고 자기 좌석에 앉아있으라는 말도 무시하고 맨 앞으로 나간다. ... 잘 늙어야 하는데...

 

맨 나중에 내려서 동생네를 만나러 갔는데, 일찍 도착한 동생네는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월드아파트에 내려, 동생 차로 다시 옮겨타고 영태리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다 열어 환기하고, 청소하고, 누릉지 끓여서 아점으로 먹고, 짐 정리하고, 빨래하고, 냉동실에서 저녁거리를 찾아 꺼내 놓았다. 정신이 없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 혼자살이의 비극이다. 일이 다 끝나면 그때부터 꿀잠을 자야겠다.

 

2022.10.25.()

 

12시간을 잤다.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맹랑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다. 여행 전에 2주일간 집을 비울 것을 예상해서 냉장실을 거의 빈칸으로 남겨놓고, 반찬을 미리 준비해 놓지 않았었다. 먹다 남은 반찬 한두 가지가 있기는 한데 상했을 것 같아 먹고 싶지가 않다. 무엇을 먹을까. 냉장고 문을 열고 텅 비어 있는 냉장실을 보는 순간에 이때다 싶어 냉장고 내부 청소를 하기로 했다. 몸은 엄청 피곤한데 정신은 점점 명료해지고 있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아주 예민해진 정신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오랜만에 냉장고 청소를 시작했다. 꺼낼 것이 별로 없어 쉽기는 했지만 큰 유리 받침대를 꺼내서 닦고, 말리고, 다시 끼우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오전 내내 치우고 나니 배가 고팠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라 기분이 좋았다.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미리 구워서 냉동실에 넣어둔 LA갈비와 얼려놓은 약밥을 꺼내 전자렌지에 데워 먹었다. 저녁에는 밥을 해야겠다. 냉동실에 있는 식재료 한두 가지를 꺼내 반찬도 만들어 놓아야겠다. 그리고 나서 안심하고 쉬기로 했다. 며칠간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은 연초부터 겨자씨 창립 40주년 기념행사 중 하나로 제주도 여행을 기획했었다. 40주년 기념행사를 잘 마치고 뒤풀이 겸 짧은 기간의 여행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념행사도 하기 전에 여행을 가자는 의견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몇몇 회원의 건강을 생각하면 내 의견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시작했으니, 나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나쁘거나 가치 없는 일이 아닌 이상 잘 진행해 나갈 책임이 있음은 분명했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주일 차이로 동생 가족의 가을 휴가 계획이 잡혔다.

 

며칠 사이를 두고 내가 두 번 제주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무리가 되는 것 같아 망설였다. 그러나 작은올케 무릎 수술 후유증이 걱정되어서 렌트카를 내가 운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두의 편리를 위해 나도 가족 휴가에 합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아 돌아 오는 비행기티켓을 10일 뒤로 미루었다. 제주도에 있는 친구 집에서 며칠 쉬다가, 미리 내려오는 도토리와 함께 펜션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겨자씨 40주년 기념 여행은 모두 휠체어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단지 멀미가 문제여 잘 먹지를 못하고 다녔다.

 

멀미도 멀미지만 입맛이 없고 소화가 되지 않아 계속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내가 너무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돈의 사용 방법에 대해서도 엄청 많이 생각했다. 공적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는 나는 명분 없이, 의논 없이 공적인 돈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랑과 관심이 돈으로 표현된다는 슬픈 진실을 깨닫는 중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방법이다.

 

그 다음은 동생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별 불편함이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틀어 요약하자면 2주간 내내 소화안됨의 상태가 계속되어 신경이 쓰였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언제 또 이런 여행을 감행할 수 있을까는 미지수가 아닌가. 익숙한 곳을 떠날 수 있다는 것, 함께 여행할 사람이 있다는 것,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 이 모두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