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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 이어령

truehjh 2023. 10. 3. 21:12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 이어령

 

이번 추석 연휴는 아주 길었다. 시간이 너무 남아도는 것 같고,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하루 이틀은 TV 리모콘을 손에 잡고 바보상자 속을 이리저리 정처 없이 방황했다. 그것이 너무 지겨워져서, 다시 할 일을 찾다가 집어 든 책이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지난해 연말에 구입했었는데, 1/4 정도 읽다가 다소 산만해지는 느낌이 들어 밀어놓았던 책이다. 저자의 깊고 다양한 지식을 내가 다 쫓아갈 수 없어서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전히 너무나 많은 정보와 서사 때문에 버거웠다. 그런데 계속해서 읽다 보니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4부에 가서는 드디어 빠져들었다. 문학 속의 언어를 분석하는 이어령 선생의 글답게 성경 구절과 성경에 등장한 언어를 이용한 설명과 고백으로 가득했다.

 

** 책 속에서 **

신학으로, 종교인의 고정된 시점으로 읽은 게 아니라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롱셀러인 바이블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즉 문학비평가의 시점으로 읽었기 때문에 종교적 해석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래서 ‘문학으로 읽는 바이블’이라는 부제를 택하고, 의문과 믿음의 문지방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내 마음을 그대로 고백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를 제목으로 삼았다. p11

 

하물며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하늘나라를 땅에 사는 사람들도 알아듣도록 말해야만 하는 예수님의 입장은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수사학을 모르고 성경을 곧이곧대로 읽으려는 사람들은 동문서답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비유를 쓰신 시인이셨지요.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풀이한 탁월한 동시통역사, 어떤 때는 인간의 얘기를 하늘에 전하고 어떤 때는 하늘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진정한 미디어가 예수님이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전이나 가이드 하나 없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를 번역해야 하는 최초의 번역자이자 최초의 반역자였을지 모릅니다. 사실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거지요. p35

 

인간에게는 종말을 불러오는 지식은 있지만 종말을 넘어서는 지혜는 없습니다. p90

 

인생을 다리로 치자면 아기집과 유택이라는 두 교각 사이에 걸린 흔들리는 다리 같은 것입니다. p135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배고프고 목마른, 끝없이 무엇인가 갈구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첫걸음이죠. p221

 

파라노이아(paranoia)는 집중적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형이고,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는 사방으로 분산되는 형입니다. 정치 주체로 비유하자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반영하는 민주주의 지도자는 스키조프레니아형이고,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파라노이아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1세기는 어떤 시대일까요? 파라노이아 시대라기보다 스키조프레니아의 시대에 가깝습니다. 분산과 이동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래서 ‘멀티’라는 말, 다양성, 다방면의 올라운드 플레이어(all-round player), 서로 다른 것을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크로스오버(crossover) 등의 말이 일상적으로 자주 쓰입니다. 외골수의 시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흩어져 있는 것들이 개성을 지키면서 융합되고 어울리는 시대이지요. 신앙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p271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그분이 나에게 꼭 어떤 보상을 해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한테 도움을 주든 안 주든 그분이 옳기 때문입니다. p281

 

저는 믿음이나 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딱 한 가지 눈여겨보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보통 누구나 쓰는 말이죠. 바로 ‘올도우(although)’입니다. ‘비록 .....할지라도’란 단어지요. ‘비록 .....할지라도’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p283

 

탄생을 저주하는 욥을 친구 엘리바스가 불경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욥은 또 한번 분노하죠. 이때의 분노는 자신을 버린 신을 향한 게 아니라 자신의 분함과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는 친구를 향한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는 단절감 때문에 욥은 자신의 재앙이 얼마나 크고 자신이 얼마나 원통한지 설명한 다음, 우정의 덧없음을 한탄합니다. p319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도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데 절망합니다. p322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 그 모든 창조물을 만든 창조자의 생각을 네가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일 뿐입니다. p327

 

생명 앞에서 한 생명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이웃이지요. 민족이라든가 혈통이라든가 이런 것을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p339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할 수 없는 세게의 마주침, 그게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p359

 

노아가 술에 취했을 때 막 까발린 자식과 보지 않고 덮어준 자식이 있었지요. 지금 사회정의라는 건 모두 까발리는 정의입니다. 원죄를 지은 인간들, 죄 짓고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보지 않고 이불을 덮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죄는 덮으려 하지만, 남의 죄는 덮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정의인 줄 알면 큰일이지요. 사랑 없는 그런 정의라면, 벌써 저 로마 시대와 사회주의 등에서부터 많이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로소 정의와 사랑이 함께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 실현됐습니다. p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