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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야기로 - Dorothee Soelle

truehjh 2007. 10. 8. 21:47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야기로

 

도로테 죌레,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여성신학적 조명

정미현 역, 한들, 2000

채수일

채수일 박사 : 한신대학교 신학부 교수

 

죌레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은 아마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분의 뛰어난 문장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문학을 공부했고 또 시인으로서도 이름을 얻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에 힘이 넘치고 감동을 주면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무서운 정직성, 신학적 철저성, 현실에 굳게 뿌리내린 실천성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녀의 책이 그렇지만, 이번에 나온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정미현 역, 한들)도 '신론'을 중심으로 한 그의 철저한 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적'인 책은 아니다. 체계 잡힌, 논리적 엄격성을 지닌, 논쟁의 역사적 연구를 갖춘 책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죌레 자신도 이 책을 학문적인 책으로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녀는 산업사회의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된 이른바 학문(Wissenschaft)이라는 것이 '전쟁을 막지 못했고, 살인의 능력을 오히려 개선했으며,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모든 자연과 모든 피조물을 겁탈하는 거대한 기계를 생산하였다'고 비판하면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봉사해야 할 세계에 대한 다른 접근, 다른 가치측정'(129쪽)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신학도 다른 접근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노래'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죌레에게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노래'(16쪽)여야 한다. 신학의 역사, 신학적 지식을 신앙의 참여 없이 전달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신학이 어려운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낯선 경험에 대한 경험 없는 진술을 하기 때문이다'는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경험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지 않는 한 얼마나 우리의 신학적 진술이 진실할 수 있을까!

 

죌레의 이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각 장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근거로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를 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도대체 어떠한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신은 가부장적으로 이해되었고 그런 신은 '전지', '전능', '편재하심'이라는 세 가지 절대성을 주장하는 지배자의 상으로 그려졌다(55쪽). 기독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전통을 지켜오면서 기독교는 권위주의적 종교로 변했다. 그러나 죌레는 여성신학의 논점에서 이런 권위주의적 종교의 '남근 숭배적 환상과 권력 숭배'에 성상 파괴적으로 맞선다. 놀랍게도 히브리 성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데 매우 신중함을 보인다. 히브리 성서에는 단지 약 스무 군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다(22쪽). 아버지의 이름은 '호세아, 예레미야, 제 3 이사야의 예언서들과 예언적으로 이해된 새 창조의 미래의 상황 가운데서 등장한다'. 출애굽 전승과 창조 기사에서도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보다 먼저 등장한다.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 곧 '나는 나다'라고 계시한 사건은 '모든 신인동형론적 표상과 아버지의 모습을 포함한 모든 형상들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런 경향은 복음서 전통에까지 이어진다. 복음의 핵심은 하늘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 뒤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23쪽). 그렇다고 여성신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하는 것이 하나의 표현 방법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표현법이 강압적으로 유일한 표현법이 된다면 그런 상징은 하나님의 감옥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신다. 과정신학자들이 말하듯, '하나님은 하나님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넘어서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특정한 언어에 감금되고, 특정한 정의로 규정된 그리고 특정한 사회 문화적 통제 형태를 갖고 있는 이름들로 알려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다'(40쪽). 그렇다면 하나님을 비권위주의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없을까? 죌레는 자연에서 드러나는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모든 선의 근원', '살아있는 바람', '생명의 물', '빛' 등의 표현은 권위나 힘,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느낌 없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상징들이라는 것이다. 또 죌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위계질서적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신비주의를 제시한다. 이 신비주의는 무의식의 바다 속에 빠져 익사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을 갈망하는 것이다(56쪽).

 

죌레가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받는 하나님이다. '욕구와 상처받기 쉬운 감정의 저편에 자리하여 스스로 자족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적 고뇌에 대하여 답하지 못하거나 단지 냉소적으로만 답할 수 있을 뿐이다'(83쪽). 죌레는 엘 살바도르의 현실로부터 신정론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무관심과 중립적 냉소주의와 연관되어 있는 제 1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신정론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신정론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82쪽). 죌레는 '고통 뒤에 이미 다시 기쁨을 보내며 비온 뒤에 해를 보내는 자동화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92쪽). 그러나 인간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과 같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과 '세상의 슬픔'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옵니다"(고후 7,1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고난이 단순히 고난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난이 기쁨을 향하여 있을 때, 또한 그 기쁨에 의하여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때이다. '기쁨과 고통의 모순적인 조화'와 이런 역설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출산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한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킨다'는 것은 삶의 신비에 가장 가깝게 이르는 근원적인 체험이며, 창조의 위대한 경험이다(93쪽).

 

죌레는 우리가 세상의 슬픔을 지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픔을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내가 야기했으나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하여' 민감해지는 것(94쪽),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자의적으로 참여하여 고난을 받는 것(95쪽)을 의미한다. 자의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정화하고 화해하고 구원하는 힘을 지녔다.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운동을 이끌면서 그런 고난의 힘을 믿은 사람들이다. 타인의 고난에 자의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난은 연대적 고난이 되고, 그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가 된다. 고난은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고난은 개인의 자아완성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우리가 생명체에 서로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연대적 고난을 기쁨으로 자의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이고 남근숭배적이고 위계질서적인 신론에 대한 죌레의 비판은 이른바 '위로부터의 그리스로론'에도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천상적 존재',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슈퍼맨과 같은 아주 다른 존재, 천상적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는 천상의 존재가 베들레헴에 잠깐 내려와 소풍 온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를 불멸의 전능자로서 신적인 존재로만 보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가현론'으로 귀결된다(102쪽). 그러나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그의 신적 의식을 자신을 무엇인가 더 나은 존재로 여기거나 섬김을 받기 위함이나 스스로 앞에 나서는데 사용하지 않았다'(105쪽).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는 갑자기 암이나 핵무기를 퇴치하는 초자연적 영웅'이 아니라 '상처받은 치유자'이시다(107쪽). 이런 그리스도론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죌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죌레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특정한 의미에서 집단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108쪽): '나사렛의 예수가 죽기까지 고문당한 갈릴리의 가난한 남자였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세상에 왔으나 우리를 통해 그 안에 살아있는 죽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나는 언제나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빙엔의 힐데가르트, 마르틴 루터 킹과 엘 살바도르에서 살해된 미국 수녀 이타 포드와 오늘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리스도란 나에게 연대성, 즉 함께 고난 당하고 함께 싸우는 것을 표현하는 한 이름이다'(108쪽). 그리스도론이 법적 개념으로서, 인격 개념으로서만 이해되어온 전통에서 그리스도를 집단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낯설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민중신학도 그리스도 사건을 민중사건과의 연대성 안에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로서의 역사적 예수가 상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들의 총체, 집단적 인격을 반영할 뿐이다. 이로서 죌레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개인적 인격과 결부시키는데서 오는 협소함(계시 일원주의) 혹은 위험성(정치적 메시야니즘)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죌레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죌레가 책에서보다 직접 만났을 때, 비록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라도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신학자'임을 경험했을 것이다. 작고 마른 체구, 깊이 패인 주름과 가늘게 뜬 눈,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면서 솔직하고 천천히 말하는 태도에서 나는 우리 시대가 이런 신학자를 가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 정미현 박사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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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 죌레 교수의 별세를 애도하며        

 

                        
                                                      정미현

 

I. 들어가는 말

지난 4월 27일 필자의 가장 친한 스위스인 친구 페트라가 전화를 하였다. 도로테 죌레 교수가 그 새벽에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죌레는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여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페트라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식을 접하고 급히 연락을 준 것이었다. 죌레는 그의 남편과 독일 남부에 받볼(Bad Boll)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하나님과 행복”이라는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에 참석하였다가 갑작스런 심장쇼크로 괴핑엔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별세했다고 한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이었다. 내가 유학 중이던 바젤대학에 초빙교수로 오게 된 죌레는 "신비주의와 저항"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주관하였는데, 이 내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대표적 저서로 출간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또한 평소에 존경하는 신학자 스스로가 가장 아끼는 책에 대한 번역을 제안하므로 흔쾌히 이 제안에 응하여서, 현재 나는 이 책을 번역하고 있다. 이전에 그의 책 "말해진 것 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를 번역 할 때에도 의심나는 구절들은 다시 물어 문장을 다듬어 갔었다. 이번 작업도 당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아직 번역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니 한없이 서글픔이 더한다. 아니 번역을 더 서둘러야 했었는데, 그래서 한국 독자들에게 그가 이해한 심오한 신비주의와 저항의 역설적 관계성에 대하여 소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이 어린다. 아직 더 붙잡고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훌륭한 신학자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내가 죌레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녀에게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그 안에 내재된 강인함이 너무나 절묘한 조화를 이룬채 스며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이 원하던 독일에서의 교수 생활이 좌절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소위 제 3 세계와 소위 제 1 세계를 넘나들면서 신학과 그 삶을 연관지은 모습은 나에게 좋은 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젤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들으며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죌레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여신학자라는 사실만은 아니었다. 서구유럽의 한복판, 백인유럽인들의 사회에서 강의 전반에 걸쳐 소위 제 3세계의 고난의 상황을 말하며 그것이 소위 제 1세계의 사람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내면의 생각들과 때로 솟구치는 백인유럽인들에 대한 울분들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감옥에 살고 있던 상황에서, 소위 제 3세계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유럽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던 한 여신학자를 만났던 것은 “자매애적 사랑”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경험이었다. 귀국한 후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필자에게 그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용기를 주고 격려를 보내주던 소중한 스승이자 친구를 잃은 것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II. 몸말
1. 도로테 죌레의 삶의 여정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1929년 9월 30일 독일 쾰른에서 법률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녀는 사춘기 시절에 2차 대전의 참담함, 암울함과 배고픔 또한 뼈저리게 맛보았다. 죌레의 가정은 교회에 열심인 그런 유형이 아니라, 성서보다는 괴테를 즐겨읽고, 교회 출석보다는 사회문제, 즉 나치주의, 반유대주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는 개신교 자유주의적 분위기였다. 어린 시절 죌레는 그리스도교인은 바보같고, 구태의연하며, 겁쟁이고, 불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많은 독일인들처럼 2차 대전중 교회의 태도에 실망하여 교회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반감을 갖었던 죌레는 신학의 기초가 되는 고전어를 몇학기 공부한 뒤에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된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에 죌레의 부모님은 무척 놀라와 하셨다고 한다. 어떤 소명의식에 의하여서라기보다, 죌레는 불트만에게서 학위한 제자인 마리 바이트(Marie Veit)와의 만남에 영향을 받고 이러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진리를 찾아보기 위해 신학 공부를 결심한 죌레는 일찍부터 급진적 성향의 그리스도교에 관심하고 있었다.

마리 바이트의 도움으로 죌레는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사상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고, 신약성서를 허심탄회하게 토론해 볼 수 있었던 기회를 갖었다. 마리 바이트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해방신학이 아니라, 독일 파시즘을 경험한 후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해방의 신학을 추구하였고 이점에서도 죌레에게 영향을 준다. 마리 바이트는 죌레가 던지는 거침없는 신학적 질문들을 묵살하지 않고, 사려깊게 의견을 존중하며 죌레의 사상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 가운데 이성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음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1949년부터 쾰른 대학과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철학과 독문학, 고대 언어를 공부한 이후 죌레는 1951년 괴팅엔 대학으로 옮겨서 개신교 신학과 독문예학을 공부하였다. 철학에 흥미를 느껴 공부를 하던 죌레는 아테네로 가는 도상에서 본인이 가려던 길은 처음부터 오히려 예루살렘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죌레가 신학 공부할 당시에 여학생은 숫적으로 상당히 열세였으나 모두가 굉장히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죌레의 신학수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는 마리 바이트외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베르톨드 브레히트(Bertold Brecht)와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esemann)등을 꼽을 수 있다.

죌레는 1954년 국가시험(대학졸업시험)을 치루고 화가인 디트리히 죌레(Dietrich Soelle)와 결혼한다. 이후 죌레는 독문예학 분야에서 “보나벤투라의 야경꾼에 나타난 구조에 대한 연구(Untersuchungen zur Struktur der Nachtwachen von Bonaventura)”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논문은 낭만주의 시대 신앙의 위기성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 그녀는 종교와 독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고, 방송국과 잡지사에서 신학과 문학에 관련된 주제를 담당하여 일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 딸 둘에 아들 한명을 남기고 첫 남편과 이혼하였고,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쾰른대학 독문학 연구소 고등교육부서에서 학생 상담일을 맡아 보았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죌레는 고향인 쾰른에서 "정치적 밤기도회(Politisches Nachtgebet)"를 주도하였는데, 이것은 죌레의 신학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된다. 죌레가 존경하는 스승 마리 바이트도 이 모임에 소속하여 활동하였고 신학적 지식, 조직과 실천면에서 다양한 조언을 주는 기둥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알려주고 저항과 갱신을 호소하였던 새로운 형태의 예배였다. 죌레는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죄에 대한 신학적 담론을 새롭게 이해하였다고 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와 소련의 침공, 자유화 운동, 베트남 전쟁과 평화문제, 남아메리카에 대한 북아메리카의 정치, 경제적 억압상황에 대한 문제화등이 이 모임에서 신학적으로 작업되어진 정치적 주제였다.
1969년 베네딕트 사제였던 풀베르트 스테펜스키(Fulbert Steffensky)와 재혼한 죌레는 이듬해 스테펜스키와의 사이에서 막내 딸을 출산한다. 죌레는 문필가로서도 대단한 활약을 하여서 여러 형태의 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독문학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였다. 1971년 쾰른대학 철학부에서 한번의 실패를 딛고 죌레는 교수자격시험에 통과한 후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마인츠 대학 개신교 신학부에서 강의하였다. 그러나 죌레는 고국인 독일에서 지속적인 교수직을 갖지 못하였고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 죌레가 독일어권 신학대학에서 교수직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차별적이고, 정치적이며, 신학적인 것이었다. 죌레의 신학이 "학문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죌레의 글들은 독일어권의 소위 학문적 신학의 시각으로 볼 때 논리적 체계성을 갖춘 것이라기 보다는 수필형태의 글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박사학위 논문은 독문학에 관련된 것이고, 교수 자격시험 논문도 문학과 신학의 관계성에 대한 것으로써 신학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한 이유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죌레의 신학적 내용과 급진적 비판 성향에 대한 거부와 대학사회의 비열한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했던 듯 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해서 대학의 제도권 안에서 교수직을 갖고 지속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하였으나 죌레는 오히려 자유로운 상태로 세계를 무대로 신학하며 신학적 시야를 넓게 갖고 활동하였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 살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와는 달랐으나, 이렇게해서 죌레는 미국의 여러 여성주의자들과 만나게되고 세계와도 만나게 되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된다. 이 기간동안 죌레는 남아메리카의 식민지 상황과 유럽 백인들에 의하여 자행된 선교의 문제성에 대하여 큰 자각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계약된 교수 생활을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온 죌레는 독일의 마인츠 대학과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초빙교수로서 가르쳤고 1994년 이후 독일의 함부르크 대학의 명예교수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대학의 울타리에만 갇히어져 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198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일에 무트랑엔에서 Pershing II 로케트 설치에 반대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고, 1988년 피쉬바하의 미군 독가스 저장소 앞에서 "평화"를 위한 시위 등 여러 종류의 집회를 주도하는데 죌레는 빠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대안적 세계화운동(ATTAC)을 주도하는데 열심이었다. 머리로만 신학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르며 신학하는 모습을 그녀에게서 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을 추상적 이론화가 아니라, 구체적 삶에 연관시키려는 것이 죌레의 신학하는 기본적 입장이다. 그녀의 삶으로서 보여준 이론과 실천의 연관작업은 참으로 귀감이 되는 것이었다.


2. 도로테 죌레 신학의 주제
죌레의 신학에는 신학과 문학, 사랑과 노동, 꿈꾸는 것과 순종하는 것, 신앙과 실천, 신비와 저항, 헤겔-맑스 전통과 종교개혁 전통등이 양자택일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졌다.

가. 쾰른에서의 정치적인 밤 기도회를 통하여 죌레는 소위 제3세계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관심하게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이후 죄에 대해 새로이 이해하게되고 "양심의 정치화"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세계의 구조적 죄악과 문제성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위르겐 몰트만, 요한 밥티스트 메츠와 더불어 1970년대에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을 주도한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 사회적 행동은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만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해방신학을 통하여 죌레는 추상적인 신학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법을 배운다. 개인적 지평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큰 지평에서 신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법을 익힌 것이다. 그러한 죌레의 신학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다. 그리고 해방과 저항을 추구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생산적 긴장이 정치 신학에 관심 기울이던 시기부터 죌레 신학의 중요한 화두였다.

또한 그녀의 신학에서는 "중간자(Interlokutor)"의 개념이 주요하게 다루어지게 되며, 구체적으로 유태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이를 구현하였고,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한스 요나스(Hans Jonas)와의 대화가 그러한 역할을 해 주었는데, 엘리 비젤(Elie Wiesel), 에밀 파켄하임(Emil Fackenheim)과 같은 저술가들도 죌레로 하여금 전통적 신학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이다.


나. 죌레는 안네 프랑크와 동갑인데, 안네의 일기를 읽고 난 후 그녀는 줄곧 죌레의 내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유머가 있고, 호기심 있고, 지적이고 생명력 넘치던 어린 소녀 안네의 죽음은 죌레로 하여금 독일 민족의 죄악에 대한 구체적 현실을 일깨워 준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이것은 죌레의 신학에서 아주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주제이다. 죌레는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 신학의 내용에 커다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신학을 하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분석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죌레에게는 독일 민족이 저지른 범죄의 현실을 직시하고 신학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신학이나 아우슈비츠와 관련없는 신학이란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현실에 대한 외면, 혹은 전혀 몰랐었다는 식의 책임회피, 유태인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등의 변명 내지 부정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죌레는 “전지전능”이라는 개념을 들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외침이 생각나서 몸서리 쳐진다고 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 그리스도인들과 독일 그리스도교의 그릇된 판단이 나치주의의 힘과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빚어낸 산물이었다. 그래서 고전적인 신학의 근본개념인 하나님의 "전능성", "힘"이라는 용어가 지닌 부정적인 문제성을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세대로서 죌레가 강조한 것이다. 죌레는 하나님을 전통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인 “전지", “전능", “편재하심” 이라는 절대적 지배자의 이미지에 문제성을 지적하며, 남근숭배적 환상과 권력숭배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다. 죌레는 성차별이 있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권력자, 역사의 지배자라는 개념의 문제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여성신학적 인식을 갖게된다. 죌레는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로 종속시키는 모든 시도는 문제적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을 단지 남성으로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편협하게 축소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부장적 이미지와 교회와 사회에서의 남성적 힘의 지배는 연결되어 나타났다.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을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여성적 이미지로 해석하려는 것, 즉 여성신학이 기존의 신학에 대한 대안이나 보충적 역할로 만족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성신학의 본질과 과제는 하나님의 여성적 이미지찾기보다 더 포괄적인 것이다. "여성신학에서 논점은 단지 인칭대명사를 바꾸는 것에 있지 않고 초월을 다른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힘에 대한 이해이다. 죌레는 힘의 분배, 힘을 나누어 가짐으로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을 꿈꾼다. 죌레에 의하면 선한 힘이란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같은 단어라도 독어 단어인 "권한부여(Ermaechtigung)"보다 영어단어인 "강화(empowerment)"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독어의 이 개념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이 단어가 망가졌다고 본 것이다. 죌레가 표현하려는 의도는 선한 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힘을 실어 준다는 것이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리스도교는 권위주의적 종교로 바뀌어 갔는데 죌레는 여성신학적 논점에서 이러한 가부장적 우상숭배의 문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고집하기를 포기하는 신이해는 여성적 사고의 요소를 포함하고 과정신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의 대립이 아니라 긴장완화의 역할을 감당한다. 또한 전지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왜소하며 보잘 것 없어 보이게 되는 위험에 빠진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죌레는 강조한다.


라. 죌레는 신학이 대학에서의 학문적 유희가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를 위한 학문”이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죌레는 많은 신학자들이 2차 대전의 대학살 이후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신학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들어냈었다. 그녀는 그리스도교가 허무주의를 직시할 능력이 없다고 여겼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속적이며 니체적 경멸의 시선을 지녔던 것이다. 소시민적 자유주의적 오만함에 빠져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녀는 산상수훈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정녀 탄생을 믿어야 되는 것을 몰랐노라고 말한다.
죌레가 책을 통해 대하게 된 스승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은 키에르케고르와 시몬느 베이유, 파스칼등이다. 특히 키에르케고르는 세속적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고 방어하고자 한 설교가였는데, 이러한 안경을 통하여 보게된 그리스도교의 모습에 매료된 후 죌레는 교회를 끌어안으려는 태도를 수용하게 된다. 이 세계 안에서 자행되는 불의한 구조에 저항하는 힘은 대학과 같은 제도권 안에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으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보며 교회가 그러한 기반이 되어질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 죌레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오래 전에 건조한 학문만을 추구하는 대학을 떠나 버렸고 그러한 영은 대학에서 불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이처럼 교회에 대하여 일방적인 부정을 하던 태도에서 탈피하여 후기에는 교회에 대한 긍정적 기대감을 표현한다. 신학은 바로 이 교회를 위한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마. 죌레가 그에게 주어진 삶의 마지막 단계에 열정적으로 몰입한 주제는 “신비주의와 저항”의 문제였다. 죌레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신비주의가 정의하는 “실험으로부터의 하나님 인식(Cognito dei experimentalis)”이라는 신비주의적 이해 안으로 몰입한다. 이것은 성서나 성직, 미사, 혹은 그외의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을 통한 하나님 인식을 말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일상성과 세계의 죄악을 외면한 뉴에이지 풍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일상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저항적 정신을 내포하는 신비주의이다. 죌레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탈세계적, 소극적, 염세적 경향을 가진 추상화된 경험이나 관념이 결코 아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신비주의는 이 세상의 고난의 문제상황을 일시적으로 잊게하는 아편과 같은 도피적 효과를 갖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죌레는 신비주의와 저항의 두 개념을 보편화하고, 이 개념들에서 엘리트적인 경향성을 떼어버리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죌레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세계 도피적이거나 탈세계적 성향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안으로 들어가며 그 안에서 정의를 추구하며 정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어우러진 것이다. 그래서 세계내적 삶의 에너지, 저항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신비주의인 것이다. 자본주의로의 단일화된 편입이 강요된 지구화의 시대에 죌레는 자본주의의 일방적, 궁극적 승리앞에서 지향할 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즉 하나님의 신비적 임재와 저항을 지향하는 해방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적 의미에서의 해방신학 뿐 아니라, 가진 자, 지배자를 위한 해방신학의 내용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해방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3. 도로테 죌레 신학의 특징
죌레가 말하는 죄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죄란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죄를 개인적 일로만 축소시키는 것은 곧 사회적 죄악, 구조악에 대한 책임회피이며 외면이기 때문에 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죌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말하는 대신에 고통받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욕구와 상처받기 쉬운 감정의 저편에 자리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고 불변하며 영원히 머물어서 인간적 고뇌에 대하여 답하지 못하거나 단지 냉소적으로만 답할 뿐이라는 것이다. 죌레는 신정론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한다. 즉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한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되며, 하나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것인가 라는 것으로 달리 접근한다.

죌레는 바울이 말하듯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과 세상의 슬픔”(고후 7, 10)을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난이 기쁨을 향하여 있고, 그 기쁨에 의하여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때이다. 바로 이와같은 고난과 기쁨의 역설적, 모순적 조화의 유비를 출산의 고통과 생명의 탄생의 관계성으로 설명한다. 죌레는 우리가 세상의 슬픔을 너머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슬픔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픔을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스스로가 야기했으나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하여 민감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자의적으로 참여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픔을 진지하게 배우는 길이라는 것이다. 죌레는 개인적인 고난의 이해보다는 집단적 고난을 더 많이 말한다. 이처럼 죌레는 고난의 문제를 소시민적, 개인화된 차원으로부터 확대하여 공동체의 시각 속에서 신학화한다. 고난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는 그녀는 항상 세계적 고난의 연대성을 시야에서 잃지 않고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시도를 한다. 죌레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만 받으려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여 고난을 야기하는 요소와 문제들을 고쳐나가는 구체적 행위에 참여하는 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내어주는 경건성이고 이것은 한쪽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통전적 행위이다. 즉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홀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합일은 세상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다른 피조물에 대한 관심, 배려와 돌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전적이 된다는 것은 곧 세계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의에서 눈을  돌려 외면치 않고, 사랑의 운동에 참여하며 스스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죌레는 특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란 말이 집단성을 표현한다고 본다. 나사렛의 예수가 죽기까지 고문당한 갈릴리의 가난한 남자였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세상에 왔으나 우리를 통해 그 안에 살아있는 죽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란 연대성, 즉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싸우는 것을 표현하는 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개인적 인격과 결부시키는데에서 벗어나 인류의 구원을 위한 대리적 죽음을 통하여 해방을 가능케한 총체적 인격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성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죌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집중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적으로 고백된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이후 역사에서 신앙인에 의하여 증언되고 고백되어지는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죌레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실재성(Wirklichkeit)으로써가 아니라, 신앙인의 구체적 행함으로 들어나게 되는 가능성(Moeglichkeit)으로 이해된다. 신앙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비열한 저승신앙이 아니라, 몸으로 나타내는 사랑을 통하여 스스로 부활의 역사에 거듭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라는 것이다.


III. 나가는 말
죌레가 1998년 한국에 방문하였을 때 한국 여성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느낀 점을 말한 것이 못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 여성신학자들이 위계질서와 가부장제의 문제성을 강도깊게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유교문화의 관습을 떨쳐내지 못하고 여성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따사로운 자매애보다는 갈등과 긴장이 너무 진하게 느껴진다는 지적이었다. 물론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위기로만 파악한다는 한계가 있었으나, 오히려 나는 그의 예리한 직관의 소리에 공감할 뿐이었다.
필자는 1999년 1월 스위스 바젤에서, 2002년 6월 오스트리아 브레겐즈에서 죌레를 다시 만나고 그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각각의 주제는 “신비주의와 저항”과 “교회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회를 신비주의자들의 시와 음악과 결합하여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주관하던 것이 아직도 무척 인상적으로 기억되어진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여성신학을 주도하는 유명한 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죌레처럼 겸손함과 부드러움이 절제된 조화를 지닌 여신학자를 아직 보지 못했었다. 베트남 전쟁의 문제성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그녀의 정치신학적 여정이 이제 끝났다. 이라크 전쟁의 문제성에 대해 할 말을 못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물론 나 자신도 포함하여)의 모습 때문에 그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지구화 시대의 문제성을 의식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해방의 의미를 되새기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녀의 치열했던 신학적 질문들, 진리를 추구하려던 열정들, 몸으로 참여적 실천을 드러내던 태도들, 이 모든 것들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죌레의 모습은 이제 이 땅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항상 살아있기에 그의 죽음이후에도 부드럽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부드러움이란 언제나 저항적 힘이 스며들어있는 역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되쏘이는 신비적 저항이며 조용한 외침이다.


필자소개
정미현 교수는 이화여대 독문학과와 동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신학을 수업하고 조직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얀 밀리치 로흐만 교수 지도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고 1994년 이후 귀국하여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며 이화여대 기독교학부에서 가르치고, 제 3세계 신학자 협의회(EATWOT) 부회장으로서 세계교회와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www.credo.or.kr)

 

- 기독교 사상 2003년 6월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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