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유년시대(1955~1972)

(1) My Story in His Hand

truehjh 2011. 1. 16. 16:12

 

1. 나와 소아마비

 

나는 1955년 만물이 소생하는 봄 3월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장군감이라고 했단다. 또래 아기들보다 조금 빨리 앉고, 조금 빨리 기고, 조금 빨리 걸음마를 띄었던 내가 돌이 지나 아장 아장 걸을 무렵, 고열이 나며 심하게 앓고 나더니 얼마 후부터 자꾸 주저앉더란다. 의사셨던 외조부의 온갖 정성어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일기에는 나의 소아마비 발병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1956년 4월 13일 ‘정희가 자꾸 열이 난다’로 시작되어, 5월 18일 일기에는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딸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아비의 심정이 적혀 있고, 그 후에는 ‘차도가 있는가 앉아서 논다‘라고 쓰여 있다. 다시 6월 29일 일기는 소아마비 걸렸다는 진단을 확정받고는 낙심천만한 가족들의 심정으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55년을 전후해서 가장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이 소아마비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소아마비에 걸렸다는 것은 6.25 전쟁 이후 궁핍한 시대에 태어난 개인의 비극이며 또한 시대적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에는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큰 병원에서 특별한 치료방법을 찾지 못하신 엄마와 할머니는 잘 걷지 못하는 나를 위해 좋다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보려고 하셨다. 나를 업고 용하다는 민간요법이란 민간요법은 다 찾아다니셨다. 너나 할 것 없이 그 당시는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이었고, 병원시설이 그리 발전된 편이 아니어서 병이 나면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병든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을 이용해서 가짜 수입약들, 가짜 침장이들, 가짜 주사들 등도 많았는데 엄마는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에 까지 매달렸고, 이런 저런 주사를 너무 많이 맞은 덕분에 내 자그만 엉덩이에는 파란 멍이 가득해 주사 놓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린 나는 침을 맞으면 뛰어다닐 수 있다는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대침을 맞고도 큰소리 내어 울지 않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고 한다.

 

엄마와 할머니와는 달리 나의 아버지는 딸의 장애에 대하여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셨다. 힘없는 다리를 운동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벼운 종이 공을 만들어서 약한 다리로 차는 훈련을 하셨고,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다리근육을 키우기 위해 오르간을 사주시며 다리 운동을 시키셨지만 어린 나는 아버지의 바람만큼 열심히 운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반닫이 서랍을 열어 놓고는 이 옷 저 옷 입어보는 놀이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는 엄마에게 ‘밖에 나가 있으면... 사람들이... 얼굴은 예쁘게 생겼는데 다리가... 쯧쯧쯧... 그래’라고 종알거리며 놀았단다.

 

소아마비에 걸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아이의 유년시절은 다양한 놀이에 노출될 기회가 적어 다른 아이들보다는 관계의 폭을 확장해가는 경험이 부족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부모님의 남다른 사랑과 기독교교육적 관심으로 크게 굴절되지 않은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냈음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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