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나는 물망초라는 꽃 이름이 들어 있는 노래로 인해 여섯 살 꼬마 소녀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찾아가곤 한다. 사람들은 여섯 살 난 아이의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겠지만 그래도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인간의 인생 여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그냥 웃고 지나갈 이야기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또한 그러한 이유를 가지고 나는 유치원에서 만난 그 꼬마 소년을 나의 첫사랑이라고 굳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섯 살이 될 무렵 우리가족은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서울에서 논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 남자아이의 집은 우리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윗집과 아랫집 정도의 거리여서 손 붙잡고 같이 유치원에 가기도 하고 심심하면 우리 집 현관 앞에 와서 ‘노~ 올~ 자~ ’를 외쳤던 아이다. 난 그 아이와 함께 양지바른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콩장을 나누어 먹곤 했다. 두꺼운 종이를 번데기 담는 봉투 모양으로 접어 그 안에 콩장을 듬뿍 담아 내와서 너 한 알... 나 한 알... 하며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먹을 것이 흔치 않던 시대라서 반찬으로 먹는 콩장을 들고 나오면 훌륭한 간식꺼리가 되었다. 까만 콩을 물과 간장에 넣어 삶다가 물엿이나 설탕을 넣고 끓여서 식히면 달작지근하고 짭짤한 그러면서 반짝거리는 반찬이 된다. 딱딱한 콩장은 치아를 운동시키며 씹는 동작은 뇌를 자극해 두뇌개발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는 그러저러한 이유라기보다 콩이 영양 보충을 위한 값싼 식품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식탁에 콩장이 없으면 화를 내시곤 했다. 그렇게 화를 내야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에 그래서인지 우리 엄마는 콩장을 참 맛있게 만드셨다.
우리가 졸업할 무렵 크리스마스 씨즌과 함께 원아들의 발표회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재롱잔치 정도일 터이고 더 크게 말하면 졸업파티라고나 할까. 발표회는 인사말, 송사, 답사, 독창, 중창, 합창, 단막극, 춤, 동시 등 다양한 장기를 자랑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춤을 추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왼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가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유치원 수업이 끝나고 발표회 연습을 하는 시간이 되면 나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유치원 마루 한쪽에 동그마니 앉아 내가 좋아하는 그 남자아이가 다른 예쁜 여자아이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6살 난 작은 여자아이였던 나는 착하고 순하게 생긴 남자아이랑 춤을 추고 싶었던 것이다. 사뿐히 뛰어 오르기도 하고 동그란 원을 그리기도 하면서 노래 한 곡이 다 끝날 때까지 춤을 추는 그 여자아이가 바로 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나의 현실과 꿈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깨달았을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어린 나이에 겪은 ‘장애와 사랑’에 관한 가슴 아픈 추억이다.
춤곡은 ‘돌아오라 쏘렌토로...’였다. 유치원 졸업앨범에 그 사진이 실려 있다. 얼굴의 윤곽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사진이지만 사진의 제목이 ‘돌아오라 쏘렌토로’라고 진한 글씨로 써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춤곡이 돌아오라 소렌토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난 아직도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어떻게 춤곡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고이 잠든 저 바다는 영원한 꿈나라, 그대의 노래와 같이 잊을 수가 없어라,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으리, 그리운 그대는 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잊지 못할 이곳에서 홀로 피는 물망초,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쏘렌토로 돌아오라’.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가사인지라 노랫말의 중간 중간이 확실하지 않지만 ‘홀로 피는 물망초’라는 대목이 언제나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물망초(Myosotis scorpioides)는 ‘나를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라는 꽃말을 가진 한두해살이 풀이다. 잊지 말아달라는 꽃말만큼이나 처연한 코발트빛의 꽃은 보는 이의 가슴에 오래도록 그 여운을 남겨 놓는다. 마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절함과 부끄러움처럼... 그리고 현실과 꿈의 괴리감으로 상처입고 남겨진 흔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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