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가족
나의 아버지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할머니 보다 먼저 서울로 내려오셨다. 한량이셨던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신 나의 아버지는 순수함과 신앙심을 지키며 혼자서 힘겹게 서울에 정착하셨다. 그 후에 이북에 계시던 할머니도 막내딸 하나만 데리고 아들을 찾아 서울로 내려 오셨다.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와 함께 종로에서 성냥공장을 운영하면서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셨다. 또한 몇몇의 지인분들과 뜻을 같이해서 해방교회를 창설하고 봉사하셨다. 해방교회 초대멤버이신 외할아버지를 그때 만나셨고, 남산 밑에 해방촌에서 병원을 여셨던 외할아버지는 순수하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큰딸과 혼인을 시키셨다. 이분이 나의 어머니이시다. 고향에서는 내노라하는 대지주의 맏딸로 누릴 수 있는 온갖 권리를 다 누리고 살다가 집도 없는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서 많은 고생을 하신 우리 엄마...
|
|
내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은 친할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잘 걷지 못하는 나는 방안에 주저앉아 있고 몇 발자국 앞에서 할아버지가 웃으시며 두 손을 마주쳤다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꼬까... 꼬까...’라고 부르며 오라고 손짓하는 장면이다. 나보다 4살 위인 장손에게는 그렇게 무섭게 대하셨던 할아버지가 손녀인 나는 무척 예뻐하셨단다. 잘 울지도 않고, 투정도 부리지 않아 순한 아이였다고 하니 무뚝뚝한 손자보다 귀여웠을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네 살 되던 해 1월 초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나이로 세 살의 기억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한 장면이다. 나는 그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에 남겨진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이불을 올려놓곤 하던 반닫이 서랍장 위에 누군가가 나를 올려놓았다. 나는 아래로 떨어질까 봐 무서워 벌벌 떨던 기억이다. 아마 이 장면도 할아버지와 관계가 있을 것 같고, 소아마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잘 걷지 못하는 어린 손녀를 움직이게 하려고 여러모로 신경을 쓰는 어른과 아이의 놀이방법이라고나 할까... 흙 위에서 뛰어다니며 놀아야 하는 시기에 집 안에만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에게 특별한 놀이거리는 없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기에 고향에서나 남한에 내려오셔서나 집에 정착하고 계신 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를 업어 키우신 착하고 예쁘신 나의 할머니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돌아가시기 전 그 짧은 기간 동안에만 외아들인 우리 아버지 집에 함께 거하셨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손녀인 내 뇌리에 몇 가지 기억을 남겨 주신 것 같다.
내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막내고모가 시집가고, 막내동생이 태어난 후에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오빠, 나, 남동생, 여동생 이렇게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2남2녀의 자녀들에게 보수적인 기독교신앙교육을 시키셨다.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우리는 식사기도를 하여야만 밥수저를 들고 먹기 시작할 수 있었다. 기도와 찬송은 우리 삶의 일상 속에 녹아 있었고 가족이 모두 모여 드리는 가정예배라는 것이 우리를 묶어주는 예식이 되어왔다. 그리고 나는 장애를 가진 딸이어서 특별한 우대를 받는다던지, 장애를 가진 딸이어서 특별히 홀대를 당한다던지 하는 차별 없이 다른 형제들과 같이 어울려 평등하게 자랐다. ‘장애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 주신다.’ 이것은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은 내용이다. 그러나 유치원을 졸업하던 때 멋진 남자친구와 함께 춤을 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그 말을 통째로 믿지는 않았다.
'Biography > 유년시대(1955~1972)'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꿈, 그림, 그리고 삼촌 (0) | 2011.05.25 |
---|---|
(5) 기적을 기다리는 엄마 (0) | 2011.05.23 |
(4) 자아정체성 형성과 아버지 (0) | 2011.05.05 |
(3) 냉혹한 첫사랑 (0) | 2011.04.10 |
(1) My Story in His Hand (0) | 2011.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