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유년시대(1955~1972)

(4) 자아정체성 형성과 아버지

truehjh 2011. 5. 5. 14:28

 

우리 나이로 일곱 살...

그러니까 만으로 여섯 살이 채 되기 전에 냉혹한 첫사랑의 추억을 남기면서 성심유치원을 졸업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입학식은 4월이었다. 나는 여섯 번째의 생일을 넘기자마자 은진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다리를 저는 작은 여자아이의 고단한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유치원과는 달리 책가방이 무거운 초등학교에 보내야하는 부모님의 마음도 남다르셨을 것 같다. 그 당시에 나는 보조기를 착용하지 않고 있어서 혼자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의원을 열고 계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네 살 때 보조기를 어렵게 구할 수 있었는데 그 보조기가 그렇게 싫었던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딘가에다 버리고 왔더란다. 하긴 가볍게 팔짝팔짝 뛰어다닐 나이에 무거운 쇠로 만든 브레이스를 신어야 한다는 것이 힘겨웠을 것이다. 그로부터 6~7년 후에는 수술을 하고 다시 보조기를 착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수술하기 전까지의 나는 한 손으로는 다리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누군가를 의지해서 걸어야 했기 때문에 무엇을 들고, 메고 다닌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등굣길이 멀다는 것이었다. 논둑을 지나고 밭고랑을 거쳐서 큰길로 들어가야 학교정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나의 걸음거리 상황을 참작해 보면 매일 왔다갔다 할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책가방을 메고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신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집 앞쪽으로 작은 문이 하나 만들어졌다. 오직 나만을 위한 문이었다. 그 문의 열쇠는 우리 집에 있었고, 그 문 앞에서 ‘엄~마~’를 외치면 엄마가 달려 나오셨다. 학교구역이라는 표시라야 겨우 쇠철망으로 만든 울타리여서 문하나 달기가 어려운 일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을 달도록 주선해 주신 선생님의 인간적인 배려와 교육적 관심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텃밭의 토마토가 빨갛게 익기도 전에 따먹곤 할 정도로 토마토를 좋아했던 나에게 그 선생님은 뒤춤에 감춰가지고 오신 토마토를 내주신 적도 있다. 고마우신 선생님...

  

논산훈련소에 계셨던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우리 집은 다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오빠는 이태원초등학교에 전학을 했지만 나는 학교가 너무 멀어서 다닐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해방교회에서 운영하던 해방구락부에 다니기로 했다. 집 바로 옆에 있는 해방교회 구락부는 나의 삼촌을 비롯해 그 당시 젊은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야학의 형태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주간반이어서 나이 많은 언니와 오빠들과 같이 공부를 하면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사생대회에 나가 몇 번의 상을 타면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장애에 관한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사건이 이 시절에 발생했다.

유치원 때 첫사랑의 파탄(?)으로 장애에 대한 상처가 무의식에 깊게 남은 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어린 마음에 커다란 상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구락부 2학년 때의 일이다. 구락부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자아이들이 다리병신이라고 하면서 나를 놀리며 따라왔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서 대성통곡하며 집에 왔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기억은 없지만 그 시간에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보통의 아버지들 같으면 어린 딸을 안아 주면서 괜찮다고, 쟤네들이 나쁜 아이들이라고 속삭여 주었을 것 같지만 나의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가 가부좌를 틀고 방 한 가운데로 앉으시더니 나에게 무릎 꿇고 앉으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엄격한 어투로 나에게 물으셨다. ‘그럼 네가 소아마비 걸린 아이가 아니냐? 그 아이들이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데 왜 사실을 부정하면서 울고불고 하느냐...  네가 병신인 것이 거짓이냐 사실이냐?’ 울지 말라고... 그 정도를 가지고 울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아마 그런 내용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내 장애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병신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진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억울해서 거의 기절할 정도에 이르렀지만 아버지의 표현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꺼억꺼억 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 병신이라는 말이 들어간 책도 소리내어 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가 지키고 싶으셨던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는 ‘참’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거짓말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였다. 참과 거짓 중에 우리는 당연히 참의 편에 서야만 했고, 사소한 거짓말부터 새빨간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거짓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내가 당한 사건은 사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병신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의 딸이 장애로 인해 억울하게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린 딸이 속상해서 울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어야 했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나이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나이다. 어린 딸의 나이는 아니다. 어린 딸에게는 사실을 인정하는 힘보다 격려의 힘이 더 필요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그때 나를 안아주시면서 괜찮다고 다독여 주셨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셨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옳지 않았다. 아버지의 가슴에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더 옳았다. 나는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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