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1981년도에 연신원을 시도했지만 그 선택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잠시의 외도 정도로 끝나게 되었고, 섬이나 산간벽지에서의 약사생활을 꿈꾸다가 지방의료원 약제과로 취직하면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회는 나 같은 도피자의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완전한 조직사회였다.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싫었다.
그 이후 난 다시 나의 약국으로 돌아왔다.
망원동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교회에서는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를 지도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외부를 향한 작은 몸짓으로 친구들과 함께 소아마비 여약사 모임인 겨자씨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장애와 연결된 거절의 경험이나 고통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었기에 그것을 보상 받기 위해 더욱 더 성실한 인간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내가 속해 있던 사회나 조직에서는 따뜻한 사람, 믿음을 주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며 지냈다. 형제들도 차례대로 결혼을 하여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가도록 작은 도움을 주었고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주위에 좋은 형제자매들이 있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고 성취감을 맛 볼 수 없었다. 왜일까? 무엇인가 막연하게 억울했다. 내 꿈을 좌절시켰던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 피해의식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장애의 거절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내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무의미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또 다시 약국을 정리하고 보건소로 이직했다. 보건소 근무로 시간의 여유는 생겼지만 꿈을 꾸지 못하는 삶의 무의미함이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보건소를 퇴직하고 1990년... 30대 중반에 나의 현실과는 다른 세상, 장애인의 천국이라는 미국을 꿈꾸며 OPI에 나가 미국약사면허를 취득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약사면허를 취득한 후에 경제력이 생기면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영어와 Medical Pharmacology에 파묻혀서 살았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EE 시험을 보러 시카고로 날아갔고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드디어 미국으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또 하나의 탈출시도이며 또 다른 선택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와의 싸움을 하고 있던 그 당시 폴 틸리히는 강력한 나의 친구였고 유일한 위로자였다. 물론 그의 저서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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