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청년시대(1973~2007)

(18) 자유 하나 : 독립

truehjh 2013. 5. 26. 23:47

 

신앙적 독립 -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고귀한 유산 (1998)

 

꿈의 대체품을 찾아 나섰던 시간들은 다 지나갔다.

마흔이라는 나이에야 겨우 막연한 꿈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제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할 것 같았고, 그래서 1995년 의정부에서 다시 약국을 개업했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교회를 옮겼다.

아버지가 섬기시던 교회를 떠나 연동교회에 출석을 했다. 나에게서 교회를 옮겼다는 의미가 시사하는 점은 매우 크다.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로부터의 신앙적 독립이라고나 할까... 나도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나의 신앙은 언제나 아버지와 연관이 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을 믿었다.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 안에 있는 한 아버지의 하나님과 싸워야했다. 아버지가 견고하게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신앙이 도구화 되어가는 것이 겁났다. 아버지는 내가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지도 않으셨지만 찬성하지도 않으셨다. 안타까워하신 것 같다. 왜일까?

 

연동교회에서는 자유로웠다. 아무런 기득권도 없이 물론 의무감도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참여하고 배우고 봉사할 수 있었다. 연동교회가 서있는 장소는 70년대 까지만 해도 좀 과장되게 말하면 기독교 진보그룹과 저항운동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어서 연동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교회 주변인 종로 5가 근처는 중학교 때부터 왕래가 많았던 곳으로 고3 방황의 시절을 그 거리와 함께 했으며, 대학로는 더 어린 시절 삼촌과 그림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기독교방송국 근처의 장호라는 다방은 내 젊음의 초상을 엿볼 수도 있는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연동교회 성가대에 참여하면서 명진이와 함께 던킨도너츠에 앉아서 수많은 이야기를 하며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기도 했었다.

 

연동교회에서 신앙적인 독립을 연습하던 시절, 현실에서도 힘을 키우며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며 새로운 삶을 그려보던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물론 갑작스런 사건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은퇴를 하신 후 심신의 약함으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계셨다. 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안타깝고 아쉬운 투병의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은 많은 교훈이 되었다. 또한 마지막 40여 일 간의 시간들은 자녀들에게 육친의 정을 정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아버지는 훌륭한 아버지였고, 훌륭한 목사였고, 훌륭한 사람이었고 인간이었다. 그가 살다간 불운의 세대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살려고 애를 쓰신 분이다.

 

나는 아버지와 교회로부터 고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것 중의 하나가 마이너 감성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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