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청년시대(1973~2007)

(17) 화려한 불발

truehjh 2013. 5. 21. 20:39

 

화려한 불발

 

1990년 10월 미국 시카고에서의 EE시험은 성공적이었다. 세계에서 모여든 미국약사지망생들 중의 일원이 되어 경쟁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시험을 마친 후에 시카고에 살고 있는 영주네 집을 시작으로 하여 플로리다의 진명이네, 뉴욕의 진숙이네를 찾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12월 24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매력적인 나라였다. 한국에서 받은 상처는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미국약사가 되어 미국약국에서 돈을 벌면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신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미국생활을 준비했다. 최소한 2년 정도는 머물러서 공부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합격자발표를 기다렸다. 꿈과 희망에 찬 기간이었다. 그리고 4월에 인턴쉽을 밟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갔다. 동료약사들과 아파트를 얻고 합숙을 하면서 미국약사시험을 위해 공부했다. 모리스인스티튜트에서 수업도 받고, 플라자약국에서 인턴쉽도 받았다.

 

힘겨운 시험준비기간이었지만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많이 포진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도움과 배려를 받으며 지냈을 뿐만 아니라 틈틈이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서 보통의 수험생들보다는 풍요로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아프다는 소식이 왔다. 마음 한쪽에서 생명에 관한 안타까움이 일어났고, 아무 생각하지 말고 시험공부에만 집중하자고 다짐하는 내 모습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난 먼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를 핑계 삼아 포기하고 돌아왔다.

 

미국약사가 되는 것이 최종목표는 아니었다. 그것을 경제적인 도구로 사용하면서 내가 하고픈 공부를 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먼 길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장애로 인해 밀려가거나 장애로부터 도피하는 삶을 마감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썼다. 성인약국에 근무하면서 기독교교육에의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서 마지막 시도를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꿈이라는 허상에 대한 일종의 확인사살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40이 되면서 기독교교육학 교수의 꿈을 버렸다. 화려한 불발이었다. 의사가 아닌 신학자라는 꿈의 대체품은 여기서 끝났다.

 

이제 할 일이 없었다. 내가 반항할 수 있는 힘은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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