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청년시대(1973~2007)

(20) 장애인권운동

truehjh 2013. 6. 14. 21:44

 

그녀가 가버린 후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약학이라는 학문과 관련이 있는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출판사업에 투자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회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도구로써의 출판은 장애로 인해 겪어야했던 부정적인 경험들과는 거리가 먼 분야라는 것이 매력 있었다.

 

조용히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있던 어느 날, 교회 사무실을 빌려 열리고 있는 여성장애인아카데미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언제나 장애인으로 살았다’가 내 삶의 화두였으며 또한 모티브였다. 장애 때문에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시절... 장애로 인해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던 시절...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희망할 수조차 없었던 시절... 그런 시절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그 장애라는 굴레를 알아보기 위해 사회복지대학원 장애인복지학과를 선택해 공부하기로 했다. 온전히 장애인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강요된 삶이 아닌,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나름대로 절박한 동기가 있었다. 난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냥 한 인간이고 싶었다. 스스로 존엄한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발버둥치고 열심히 살아 왔다. 그러나 성취감은 느낄 수 없었고 그 길은 역경과 좌절만이 있었다. 왜일까?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눈으로 상대방의 장애를 확인하면 장애인이라고 낙인 하지만, 장애를 가지고 있는 당사자는 장애로 인해 거절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부정할 수 없는 장애인임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있어서의 장애의 경험이 그렇다. 교육기회선택에서의 거절경험, 직업선택에서의 거절경험으로 인해 나는 장애인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장애를 가진 몸을 가지고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조건은 장애와 여성이라는 이중적 편견에 의해 처절한 차별을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누구나 똑같이 경쟁하여 같은 목표점에 도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장애여성에게는 처음부터 공평치 못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경쟁이었다.

 

늦게나마, 장애인복지학을 공부하는 동안 나를 뒤돌아보면서 내 안에 가둬 놓았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사가 되어 좋은 일을 하면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고자 했던 한 여자에게 있어서 세상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 스스로 또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자라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 자기정체화 시키고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나를 위해 도움이 되고 조금은 행복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이것을 표면화하여 구체화시키고 싶어졌다. 장애여성으로 자기정체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는 경험은 어떤 것일까.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특히 우리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삶인가에 대하여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논문으로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사회적 통념에 관한 질적연구’를 하게 되었다.

    

장애여성으로써의 정체성은 자신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자기존중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편견으로 인해 일그러진 삶을 살게 된다면 그리고 그 피해의식으로 인해 삶의 질이 저하되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나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낙인을 주는 사회적인 가치와 기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현실의 삶에서 의식과 구조적인 제도의 변화를 실행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차별 속에서 자유를 꿈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난 또다시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꿈꿔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 기준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애여성공감, DPI여성특위, DPI세계대회여성소위, 멋진여성, 이랑, 장애인인권센타, 장애여성네트워크 등을 거치면서 장애여성의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Biography > 청년시대(1973~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자유 둘 : 회심  (0) 2013.06.07
(18) 자유 하나 : 독립  (0) 2013.05.26
(17) 화려한 불발  (0) 2013.05.21
(16) 탈출구로써의 미국  (0) 2013.05.07
(15) 겨자씨 창립  (0) 201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