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There/터키(2013)

[2013 보행장애인의 터키여행] 터키 공부

truehjh 2013. 7. 16. 21:02

2013.07.06. 


신기한 사실은 터키여행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지난 한 해 동안 소리들에서 터키관련 책들을 네 권이나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터키에 관련된 책들 다섯 권이 내 책장 안에 있어서 더 이상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다.

일단 기분이 좋다.

-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이호준)

-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이호준)

- 문명의 고향 티그리스 강을 걷다(이호준)

- 터키에서 읽는 로마사(곽영완)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앤드류 망고 지음/ 곽영완 역)


터키여행에 대하여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하기 전에 ...

우선 터키가 아시아인지 유럽인지를 인터넷 써핑으로 간단하게 확인해 보았다.


아나톨리아(Anatolia)

- 위키백과 : 아나톨리아는 서남아시아의 한 지역으로, 오늘날 터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도(半島)를 말한다. 이전에는 아나톨리아를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렸다. 이 지방의 북쪽에는 흑해, 북동쪽에는 캅카스, 남동쪽에는 이란 고원, 남쪽에는 지중해, 서쪽에는 에게 해가 있다. 아나톨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문명의 터전이었다. 아카드, 아시리아, 히타이트, 아르메니아, 로마,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에 있었던 중요한 나라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문화적 교류와 충돌의 장(場)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지리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삼면은 흑해, 에게 해, 지중해와 접하고 있고, 지역의 대부분은 넓은 고원 지대이다. 아나톨리아의 북쪽과 동쪽에는 산이 더 험하다. 흑해와 에게 해가 이어지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차나칼레 해협 사이에 마르마라 해가 있다. 마르마라 해 북쪽은 유럽 대륙이며, 보스포루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던 지점이다.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 덕분에 인구 역시 매우 다양하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주요 무슬림 소수 집단을 이루고 있는 쿠르드족이나 아나톨리아 남쪽에 주로 사는 아랍인 외에도 아나톨리아 각지에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유대인, 조지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이 소수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 브리태니커 :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입지조건 때문에 문명 초기부터 양쪽 대륙에서 이주해가거나 정복 전쟁을 하러가는 수많은 민족들이 지나는 교차로였다. 아나톨리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전쟁의 현장으로 알려져 왔다. 중앙아시아의 연장인 중부 고원지대는 가항 하천이 전연 없고 자연적인 출입로도 거의 없는 자연지역으로 경관이 단조롭고 기후가 혹독하다. 기름진 계곡이 있고 기후가 좋은 서부 해안지역은 실제로는 유럽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구적으로 정착을 하기에 불리한 환경이 아나톨리아의 역사를 유목 부족들과 식민주의자들의 여정(旅程)의 역사이자 군소 국가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로 만들었다.

......

로마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여러 개의 주, 동맹국, 독립국에 가까운 공국들로 편성했으며, 로마의 지배 하에서 아나톨리아, 즉 소아시아는 발전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3세기말 제국을 재편할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대군관구(大軍管區)들을 해체하고 속주들을 여러 행정관구로 묶었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와 점점 아나톨리아 전지역으로 퍼지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 7개의 소아시아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워졌다.

395년 로마 제국이 양분될 때 아나톨리아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토착민의 언어와 옛 종교들이 일부 사라지면서 철저하게 그리스화되었다. 6세기가 끝날 무렵, 번창했던 아나톨리아는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된 평화와 지나친 중앙 집중화로 '미로같이 복잡한' 또는 '권모술수의'라는 뜻의 비잔틴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주 크로스로우 2세가 616~626년 아나톨리아를 침략해서 보스포루스 해협에 진지를 세웠으나,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쿠르디스탄까지 진격하여 비잔틴 제국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곧이어 아랍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668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그로부터 3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이 유프라테스 강의 교두보들과 실리시아의 관문들을 장악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곧 동양에서 더 위험한 적이 나타났다. 1067년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등장하여 실리시아와 카파도키아를 쑥밭으로 만들었으며, 1071년에는 로마누스 디오게네스 황제를 사로잡았고, 1080년에는 니케아를 점령했다. 셀주크족의 일파가 룸 제국을 세우고 이코니움을 수도로 삼았다. 12세기에는 다수의 셀주크 아타베크인들이 아나톨리아의 여러 지역을 지배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족은 시리아와 그 동쪽지역, 그리스인들은 폰투스, 아르메니아인들은 실리시아, 다니슈멘드족(아르메니아의 한 종족)은 시바스, 바얀두르족(그리스의 한 종족)은 에르제룸을 지배했다.

몽골족이 아나톨리아 전지역을 휩쓸고, 1243년에 룸 제국의 셀주크 술탄을 굴복시켰다. 투르크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잇따라 일어난 권력투쟁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마침내 패권을 쥐고 브루사에 나라를 세웠다. 1400년에는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아나톨리아의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을 거의 석권했으나, 곧이어 티무르한테 패하고 감금되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를 에게 해 연안까지 휩쓸었다. 티무르가 죽자 오랜 투쟁 끝에 메메드 2세(1451~81)가 카라마니아와 폰투스를 합병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이 패권을 되찾았다. 그 뒤의 아나톨리아 역사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이다. 1832년 이브라힘 파샤가 지휘하는 이집트군에게 도전을 받을 때까지 투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그 지배가 무너졌다. 11세기에셀주크의 대군이 아나톨리아를 유린한 데 이어 투르크족의 유민들이 계속 밀려왔다. 그들은 토착민들을 학대하지는 않았으나 아나톨리아를 볼모지로 만들었다. 모든 지역에서 농경이 중단되었으며, 토착민들은 그들의 땅을 버리고 산이나 도시로 피신했다. 따라서 토착 농민들 자신이 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쳐들어온 몽골족이 도시들을 약탈하고 '무장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는 모든 곳'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오스만 제국 초기의 술탄들이 강제로 터키어의 사용을 유도하고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시킴으로써 헬레니즘 문명의 자취는 거의 모두 사라졌다. 아나톨리아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철도건설 및 그에 따른 교역과 지방 공업의 성장 모두 큰 타격을 받았다. 1918년 10월 30일 투르크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할 무렵에는 영국군이 아나톨리아의 아랍어 사용 지역을 전부 점령하고 있었다. 1919년 5월 그리스군이 스미르나와 이오니아 연안 지역의 대부분을 빼앗고 점차 에스키셰히르(옛 이름은 도릴라이움)와 아피운카라히사르까지 점령해 들어갔다.

1920년 8월 투르크가 세브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아나톨리아는 5세기 동안의 투르크 지배를 통해 확정된 지리적·종족적인 경계 안으로 축소되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의 위임 통치를 맡았고, 프랑스는 시리아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아나톨리아의 남부와 남동부를 각국 세력범위 지역으로 나눈 3국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곧 무스타파 케말(후에는 아타튀르크)이 이끄는 투르크 민족주의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해 투르크군이 실리시아에서 프랑스군을, 스미르나에서 그리스군을 몰아냈다. 세브르 조약은 승인되지 않고 로잔 조약(1923. 7)으로 대체되었는데, 로잔 조약을 통해 좁은 범위의 아나톨리아에 대한 투르크의 주권이 인정되었다. 1923년 11월 술탄국과 칼리프국이 잇따라 무너진 후 터키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앙카라를 수도로 삼았다. 로잔 조약과 함께 연합국의 후원으로 터키와 그리스는 주민 교환협정을 맺었으며, 그 협정에 따라 약 10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아나톨리아 서부지역에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