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랑/참좋은이웃

우리 선생님의 다리를 고쳐주세요

truehjh 2015. 6. 1. 21:36

  

미국에 살고 있는 Y가 얼마 전에 고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나에게 딱 맞는 손가방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 내 블러그의 글 한편을 읽고 고른 선물이란다. 자그맣고 간편한 핸드백을 선물로 내밀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운동하면서 동네 반 바퀴 돌 때 핸드폰 넣고 다닐 수 있는 손가방이란다. 그녀는 내 블러그의 글들을 참 꼼꼼하게도 읽었나보다. 자세하게 공감하며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정서들을 공유해 주는 그녀의 세심함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그날 그녀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들려주며 예쁜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러니까 한 20여 년 전에 약국에서 만나본 후로는 얼굴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식도 듣지 못하고 살았다. 최근에 내 블러그에 찾아와 가끔 소식을 남기곤 해서 다시 연결이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그동안 못 다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창시절 그녀의 친구를 불러내서 함께 저녁을 먹고 인사동 길을 돌아다니면서 옛일들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 때 그녀의 말이 “제가 선생님 다리 고쳐 달라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아세요?”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그 꼬마 아이들이 교회학교 선생님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순수한 것이었는지를 전해 들으며 마음이 울컥해졌다.

 

“우리 선생님 다리 고쳐주세요... 예수님...”

열 살을 갓 넘긴 꼬마 제자가 소아마비를 앓아 보행이 불편한 대학생 교회학교 선생님을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단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몰라요... 선생님...”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잠시 머리가 하얗게 되는 기분이었다가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학교 선생님을 위한 기도의 내용이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옛날 나를 위해 기도하던 꼬마 녀석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 했다.

 

그녀의 엄마가 젊으셨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분의 자녀들을 가르쳤던 과외선생이었다. 내가 약사고시 보러가는 어느 추운 날 아침에 그분이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따듯한 커피 한잔 사마시고 돌아오라고 하시며 커피 값을 손에 쥐어 주시면서 응원해 주셨다. 참 다정한 분이었다. 그분의 기도 덕분인지 나는 약사고시에 붙어서 약사의 길로 들어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어린 삼남매를 남겨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교회학교 학생부 아이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몇 백송이의 하얀 종이꽃을 만들던 그 밤의 슬픔을 잊을 수가 없다.

 

얼마 후에 그녀의 식구들은 멀리 이사를 갔기 때문에 가끔 오고가는 소식을 통해서만 그녀의 성장과정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사춘기를 지내고 청년의 시기를 지내는 동안 얼마나 많이 엄마를 그리워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녀가 미국으로 생활반경을 옮기기 전 어느 날 약국을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이야기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남편과 함께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직접 듣게 되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아픈 다리를 고쳐달라던 간절한 어린 소녀의 기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때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고, 만나서 웃을 수 있고, 웃으며 서로의 건강한 미래를 염원할 수 있어서 고맙고 행복하다.

 

인생의 초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일가를 성실히 가꾸고 일궈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럽다. 지난날의 어려웠던 또는 즐거웠던 일들을 눈물과 웃음으로 이야기하며 성숙한 중년의 삶을 보여주는 그들이 대견하고 감사하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나 또한 변화되고 더욱 성숙해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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