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장년시대(2008~2019)

e시니어진입기 - 정형외과와 보조도구

truehjh 2017. 5. 30. 19:53

정형외과와 보조도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에는 네발로 걷다가 다음에는 두발로 걷다가 나중에는 세발로 걷는다고 하지 않는가.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의미가 있다. 나는 네발로 다니다가 겨우 두발로 서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될 무렵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열이 심하게 올랐었고, 왼쪽다리의 운동신경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업혀 다녔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이다. 한손으로는 다른 사람의 팔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왼쪽다리를 짚어야만 겨우 이동할 수 있어서 혼자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로 아버지의 등에 업혔지만 네 살 위인 오빠의 등에 매달려 다니기도 했다. 책가방이나 작은 소지품들의 운반은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의 몫이었다. 아버지나 오빠가 없을 때는 몸이 약했던 엄마가 업고 달렸다. 장애를 가진 딸을 위해, 장애를 가진 형제를 위해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우리 가족의 생활상이다.

 

11살 때 내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가 어린 딸의 장애를 고칠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과감하게 수술을 결단하셨던 것이다. 5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의료상황을 짐작해 보면 굉장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경제적인 부담은 말할 것도 없겠고, 오랜 기간 입원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일상을 포기하고 매달려 있어야 하는 부담도 우리 가족 구성원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약한 다리의 근육을 헤집어 놓은 수술의 효과는 기대이하로 엉망이었지만, 그 대책으로 보조기 사용을 결정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보조기를 착용하면 식구들을 의지하지 않고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혼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어떠한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에게는 상상 이상의 자유가 주어졌다.

 

보조기 착용으로 인해 이전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나에게 다가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걸어 다니는 것, 거기다가 두 손이 자유로워져서 책가방도 내가 들고 다니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크게 내 활동반경의 폭이 넓어졌다. 무거운 쇠와 가죽으로 다리를 꽁꽁 묶어 놓아야 하는 보조기 착용 방식은 한참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방법이었으나, 그 불편함이 힘겹다기보다는 독립적으로 다닐 수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 모든 것을 덮었다. 나는 남의 손을 잡고 조금 의지하면서 다니면 편할 것이라는 충고도 뿌리치고, 혼자 서서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어린 마음에는 스스로 걷는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한 쪽 다리는 튼튼하다고 자부하며 온갖 체중을 다 실어 산 넘고 물 건너 힘차게 걸어 다녔다. 무려 50년 이상을 그랬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튼튼했던 다리의 무릎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노화에 의한 증상이고, 장애를 가지고 살지 않았더라도 생길 수 있는 증상이려니 하면서 나이 탓이나 해볼까 하다가도 평상시와 같은 활동을 해야 하니 통증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열심히 걸어 다닌 것이 원인이었을까. 그 무릎이 이제는 지쳤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정형외과 의사는 퇴행성관절염이라며 약과 물리치료를 처방한다. 한쪽 다리의 무릎이 고장 나기 시작하니까 힘을 충분히 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픈 방향을 피해 다른 근육을 사용하려 하니 안 쓰던 근육이 부담이 되어 팔, 어깨, 옆구리에서 근육통이 생긴다. 몸이란 신비하다. 한 군데가 망가지면 그것에 무리를 줄여주기 위해 반사적으로 다른 근육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근육과 관절의 부담을 줄이면서,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게 하는 보조도구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팡이다. 이제 세발로 다닐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다. 지팡이의 사용은 십여 년 전부터 친구들이 강력하게 권하던 사항이다. 그렇게 권유를 받고도 사용하지 않던 지팡이를 이제 스스로 꺼내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지팡이는 엄마가 남겨놓은 유품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지팡이를 짚으면 한쪽 팔과 손의 기능이 제한된다. 지팡이를 들지 않은 남은 한 팔과 손만이 자유롭다. 내가 보조기를 착용하고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 있었던 그 기간이 너무나 행복한 기간이었음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이제 다시 깨닫는다. 양쪽 지팡이를 짚어서 네 다리로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다른 사람을 의지 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고마울 것 같다.

 

한편으로는 걸을 수 없는 조건이 된다면 어찌해야 할지 슬슬 걱정이 된다. 지금처럼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걸을 수 있는 정도는 유지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현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역시 고통이다. 그것은 또 다른 욕심을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꿈을 꾸는 것과 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 아닌가. 늙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지금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두려워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몸도 퇴화해 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를 먹을 뿐만 아니라,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이 엄연히 가야 하는 인생길인데 어느 한 지점에 영원히 서 있겠다는 욕망은 헛될 뿐이다. 병들어 가는 것을 애써 모른척하거나, 거부하거나, 멈추려고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팡이를 짚는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변화에 대비하여 마음을 다잡아 보자. 보행을 대체할 수 있는 휠체어라는 도구가 또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