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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도토리선생님 - 교육기부

truehjh 2012. 5. 4. 17:19

교육기부


도토리가 다니는 중학교에 가서 직업특강 교육기부를 하고 왔다. 진로체험의 날에 약사라는 나의 직업을 소개한 것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도토리는 내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서 가끔 뜸을 들이곤 했다. 별로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었더니 급기야는 종이 한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교육기부 신청서 용지였다. 담임선생님께는 고모에게 허락받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고 왔지만 내가 선뜻 나서 줄 것 같지 않은 눈치여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 용지를 보자마자 학생들이 장애인인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제일 먼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도토리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하여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고모, 그 고모의 진학 좌절 경험이 자기반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신념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내가 거절하면 도토리가 상심할 것 같아서 생각해 보겠다고 이야기했다. 하루 밤 생각해 보니 도토리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기부하는 쪽으로 결정을 했는데 또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가 걱정이 된다. 내가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시절의 시대적 상황, 전쟁 후의 경제환경과 교육환경의 열악성, 장애인에게 제도적인 뒷받침이 전무했던 시절의 어려움,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꿈이 있어야 하고,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진정성을 담아 나 개인의 경험을 들려주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로 인해 의대에서 거절당하고 약대에 입학했을 때의 좌절감과 우울감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려운 환경이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지라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자는 것, 비록 꿈이 좌절된다 해도 또 다른 길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 등등을 이야기로 준비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하고, 그 질문에 답을 한 학생들에게 줄 이벤트 선물로 비타민C 트로키도 준비해 가지고 갔다.


진로체험이라는 학교 행사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듣고 도토리의 교실로 들어갔다. 호기심에 가득한 아이들이 내 걸음걸이를 목격하고 있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교탁 앞에 섰다. 중학교 1학년 14살짜리 아이들의 눈을 사랑 가득 담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파릇파릇한 눈빛을 마주하면서 어린 시절의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나는 신이 났다. 시큰둥해 있던 아이들도 자신의 꿈 이야기를 슬쩍슬쩍 꺼내 주었다. 45분 동안에 꿈과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긍정적 눈빛을 주고받으며 질문들에 답하고, 열기와 웃음소리로 가득한 교실을 나왔다.


늦은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도토리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자기 반에서 가장 말 안 하는 남학생까지 질문을 하게 만들다니 고모는 대단하단다. ‘곁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만점’이라는 평가다. 아이들은 겨드랑이에 난 땀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난 아직 왜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정도의 지적으로 만족했다. 준비하는 과정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 하지 않는가? 나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능력감에 빠지곤 했다. ‘누군가’라는 대상은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어야 하는데 먼 곳에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살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최근에는 그 ‘누군가’마저 놓아버리고, 그냥 막연하게, 기다림도 없이, 포기에 가까운 상태로 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는 삶! 이제 다시 도전해 보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어른에게도 역시 아직 희망이 있다.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더 의미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