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가벼운 삶
초겨울 햇살이 투명한 오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얼핏 보았다. 햇살에 드러나는 흰 머리카락들이 정겹기는 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들이 이제는 제법 떼로 몰려 있어 외롭지 않게 보인다. 모여 있으니 한결 여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염색을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보아줄만 하다. 물론 나의 기준이다. 그러나 얼핏 보는 것과 자세히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돋보기를 끼고 다시 거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고, 파마기 없는 회색 머리카락들이 삐죽삐죽 나와 있다. 얼굴 전면에 흩뿌려진 검은 점들, 피부 밑으로 돌출된 가느다란 혈관들, 처진 눈꼬리 속에 감춰진 진한 슬픔까지 유리 너머로 보인다. 돋보기를 통해 내 눈으로 다시 들어오는 거울 속의 나는 참 생경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거울에서 만난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10년 이상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는데, 이젠 동안이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급격하게 퇴화하고 있다. 노화와 젊음의 경계가 얼굴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그래도 괜찮다. 화장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아쉽지 않다. 늙음과 노쇠를 인정하면 된다. 인정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구태여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화장으로 얼굴을 꾸미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았듯이 내 삶을 장식하기 위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싶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구태의연한 것 같으면서 안온한 삶 역시 불만은 없다. 이렇게 안온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도 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 조바심치다가도 ‘아... 몰라... 그냥 지금이 감사할 뿐이야!’ 이렇게 포기하고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고 있다. 주변에 특별한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간절한 기다림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이뤄야 할 절박한 꿈이 없으니 피 토하는 좌절도 없고, 모험을 즐길 힘이 없어서 위기감도 없다. 그저 만사가 무질서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제 길을 벗어나지 않고 흘러가고 있으니 안심이다. 이러한 안일과 평정을 그냥 누려도 되는 것인지 가끔 되묻곤 한다. 더 이상의 안온한 삶을 바라는 것이 무례한 것 같아서 육체의 고통마저 없기를 바라지 못하고 있다.
버리는 연습을 마치고 나서, 겹겹의 허물을 벗어내고 나서, 불만과 욕망을 거둬내고 나서, 이제 단순하고 가벼운 삶의 길을 걷고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허례와 허식을 멀리 하고, 잡다한 계획, 꿈, 인간관계, 희망사항을 덜어내고 버릴 것을 다 버리고, 몇 겁의 허물을 벗어 버리니 새로운 옷을 입을 필요도 없이 순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온 듯하다. 가난하고 가볍고 간단하고 심플한 삶으로 돌아오니 진짜 단순해진 것 같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제 앞으로 몇 단계의 삶이 남아 있을까. 결국은 모든 단계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내야 하는 일이 관건이다.
남아있는 삶의 순간들을 최대한 간소화하고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간소화한다고 즐거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방향성을 확고히 하고 단순한 삶으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 누리며 살아가기를 희망하면서 단순하고 가벼운 삶을 향해 다가서야겠다. 단순하고 가벼운 삶이 이웃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시선이 창밖으로 무심코 옮겨지면 머릿속은 다시 다른 생각에 머물게 된다. 햇빛은 화창하게 빛나고 나뭇잎들은 찰랑거리며 그 빛을 반사하고 있다. 조금 전의 생각은 다시 멀리 도망가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가끔은 그 순간을 깨우기라도 하는 듯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소리다. 평상시에는 왜 저 소리를 무심하게 흘리고 살까.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머리를 비우지 않으면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보다. 그저 나에 대하여 무념무상으로 존재할 때만이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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