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혹은 기대감
여러 겹의 허물을 벗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 기대감이 알 듯 모를 듯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경계선 상에 있는 것들을 희망 아니면 포기, 기대 아니면 좌절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한, 다가오는 듯하면서 멀어져 가는 듯한 미지의 기대감은 긴장감으로 나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50대 중반까지만 해도 ‘무엇이 되어야’ 할 것 같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할 것 같은 긴장감으로 살아오다가 최근 몇 년간은 노화하는 육신의 연약함을 추스르다 보니 긴장이 풀어지면서 약간 느슨해진 상태였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편이라고 생각하며 의지하고 살았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최근의 심각한 우울감과 무력증은 ‘꿈의 상실’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꿈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실 줄로 믿었던 건 아니지만, 안 계시는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몇 년이나 더 엄마와 함께 공동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에 대하여 현실적인 계산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엄마가 안 계시니 어떤 꿈을 꿔야 하는지 막막했다. 꿈이 없다는 상황이 미래가 없다는 상황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의욕상실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외롭지 않다고 자꾸 나를 다독이며 현재에 감사하자고 다짐해 보았지만 희망을 품고 있지 않으니까 그 순간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동안의 길들여진 무력감이 나를 붙들고 있어서, 저혈압 상태의 연속과 함께 내 영혼이 스스로 아무런 의미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감과 무력증을 통해서 다른 상황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나 보다.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전자출판창업을 위한 시니어교육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삶의 컨텐츠를 풀어낼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전자책제작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까지 써왔던 글들을 묶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고, 그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도구를 찾은 것이다. 내 삶의 기록들을 남기고 싶어 졌다. 어쩌면 마지막 시도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마지막 시도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예기치 못한 것이지만 상황에 밀려 또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갈등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동감에서 비롯된 목적이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밀려서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것이다. 회갑을 맞아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삶에 주신 축복이며 은혜다. 이 한 번의 시도로 수많은 꿈의 파편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흩어져 있던 에너지들을 말끔하게 산화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맑고 투명한 기쁨의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의 방황은 없을 것 같다. 젊은 날에 가졌던 과욕을 버리고, 겉치레일 뿐인 허물을 벗고 나서 소박한 꿈 하나를 붙들 수 있다면 말이다. 종국에는 이것이 내가 걸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겉옷이 되어 모든 것을 여기에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기쁨과 감사의 노래로 춤을 추며 살다가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있음이 감사한 순간들로 인해 눈물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출판사의 일을 계속하느냐, 약국의 일을 계속하느냐,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을 계속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편집자이건 약사이건 장애운동의 현장에 뛰어든 사회활동가이든 간에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하는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조용한 시골, 친절을 기대하지 않는 주민들에게 선을 베풀며 산다. 그리고 의미가 조금이라도 부여된 소일을 한다. 나머지는 휴식, 자연, 책과 음악,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다.’라고 톨스토이가 말했다. 톨스토이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는 있다. 단지 나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행복일 뿐이다. 이제 나는 일의 성공이 아니라 내 삶의 행복을 우선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싶다. 내가 기뻐하는 것으로 행복한 삶이 전개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현재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과 나누며,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살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나누고 베푸는 일을 통해 남은 삶이 의미 있어질 수 있겠다는 기대감 혹은 긴장감으로 만족되는 시간이다.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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