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벗기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앞으로도 그냥 지금처럼 살면 되는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고백은 미래의 시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솔직함이 아니다. 신만이 알 수 있는 미래의 영역을 향한 아쉬움의 토로도 아니다. 지난 삶에 대한 회한임과 동시에 경이로움의 표현이다. 지나온 시간들은 어떤 영향을 끼치며 내 삶을 이끌어 갈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시간을 셈하고 싶은 유혹이 어느 구석에서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다가 한 순간 나를 자극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자극을 받는 순간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니 말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는 이유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는 것이다. 또한 짧지 않은 지난 삶을, 그 미완성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미래의 시간을 가꿀 작은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다. 회갑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나는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의 계절을 거치는 동안에 몇 번의 허물벗기를 해 왔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지는 못했다. 고장 난 곳을 덧대고, 구멍 난 곳은 메꾸며 그저 조금씩 조금씩 삶의 완성을 위해 나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 삶의 완성은 보이지 않고, 군데군데 찌들어져 이어진 삶의 흔적만 보인다. 그렇게라도 이어진 삶의 흔적이 고맙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완성된 삶을 위해 확실한 허물벗기가 필요한 것 같아 긴장된다.
또 한 번의 허물을 벗어내야 하는 시기를 놓쳐버릴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갈 거리보다 뒤돌아서면 보이는 거리가 훨씬 더 길어졌는데 어찌해야 허물벗기에 성공할 수가 있을까.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꿈과 관심과 녹슨 재주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다 벗어던지면 가능할까. 나 비슷한 나 말고, 누에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완벽한 허물벗기를 할 수 있을까. 지난 삶에 누덕누덕 덧붙여진 조각들을 떼어내면 다시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삶의 벌거숭이가 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게 되는 것일까. 최초의 기억으로 환원되면 또 하나의 허물을 벗고 향기로운 시공으로 초대될 수 있을까. 화려한 조각이든지 누더기 조각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때 타고 색 바랜 기억의 편린들일 뿐인데 그것들을 떼어내면 그다음은 행복할까. 간편할까. 조금 더 자유로울까. 어떻게 해야 이런 연역적 추론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지고 있던 옷을 다 버리고 전혀 새로운 옷으로 탈바꿈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럴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요즘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내 삶에 있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나 선택을 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덕누덕 깁고 덧붙인 이 무거운 겉옷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가벼운 옷만 남기고 싶을 뿐인데, 점점 더 단단해지는 갑옷을 벗어던질 힘이 남아있는지 궁금하고, 두꺼워진 껍데기 속에 과연 말랑말랑한 속살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의심스럽다. 아직 남아있는 속살을 드러낼 준비가 덜 되어 있지만, 살짝살짝 속살이 드러나는 가벼운 겉옷 하나만 남겨둘 수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버려야 할 것들을 다 버리고, 가볍게 걸칠 수 있는 겉옷 하나 남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그림이어도 좋고, 바느질이어도 좋고, 글쓰기라도 좋다. 그림이나 바느질 또는 글쓰기라는 아주 가벼운 겉옷 하나 걸치고 있다가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 놓을 때가 되면 훌훌 털어 버리고 그것마저 필요 없는 곳으로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소풍 잘하고 간다고 인사하며 떠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직 포기하지 못한 나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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