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과 안타까움
날씨가 추워지니까 예전에 없던 증상이 나타난다. 알러지 증상이다. 겨울로 들어서면서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서인지 아침을 먹고 나면 재채기와 콧물이 술술 나와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아침식사 거리 때문인 것 같다. 아침에는 주로 냉장고에서 꺼낸 사과 몇 쪽과 삶은 달걀 한 알을 먹는다. 엄마 돌아가시고 난 후 혼자서 늘 그렇게 먹었다. 그런데 요즘은 참을 수 없는 알러지 증상 때문에 음식의 냉기를 빼고 먹기로 했다. 사과는 전날 밤에 미리 꺼내놓고, 냉장고에 있던 삶은 달걀은 까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살짝 데워 먹는다. 그래야 재채기와 콧물이 안 나온다. 적응력, 면역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후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뭔가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는 행동도 생겼다. 목이 올라온 셔츠를 입으면 답답해서 라운드넥 옷들을 즐겨 입었었는데, 요즘에는 목이 허전해 뭔가를 둘러야 한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도 팔이 시리다고 느껴지면 어깨에 스카프를 둘러 양 팔을 덮어야 한다. 오늘은 아예 스웨터를 걸쳐 입었다. 앉아있을 때에도 엉덩이가 시린 것 같아 의자 등받이에 담요를 둘렀다. 엄마가 쓰시던 무릎덮개도 찾아다가 올려놓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 나오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무릎담요 덮고 홀로 흔들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내다보며 회상에 젖는 모습과 나의 미래가 오버랩되어 온다.
또 있다. 춥다고 움직이지 않으니까 모든 근육의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퇴화가 빨리 진행되는 것 같다. 관절이 아프고 근력이 약해졌다. 몸이 뻑뻑함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 나이가 되면 그 정도는 다 아파요...’ 지금 생각하니 참 철이 없는 말이다. 엄마에게 참으로 냉정한 말을 했구나 싶다. 그때마다 동감해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내가 아프고 보니 누군가가 ‘어머, 아프구나!’ 이렇게 동감만 해주어도 고맙더라. 나도 ‘그 나이엔 다 아파!’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한다. 몰라서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알아달라는 말이었을 뿐인데,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해드리지 못했다.
작은 아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도 엄마는 늘 쓸쓸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으로 해 봤다. 엄마의 작은 책상 위에는 성경과 노트가 놓여 있었고, 가까운 곁에는 바느질 도구가 있었다. 방에 홀로 앉아 성경책을 읽고 계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 방에서 혼자 그 많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배덮개, 무릎덮개, 등받이, 담요 등등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챙기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그냥 무심했다. 내가 경험해 보니까 이제야 조금 알겠다. 그렇게 무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엄마에게 크게 불효한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고 살았다. ‘이 정도라도 하는 딸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산 것 같다. 한심한 딸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몇 년간의 삶, 그리고 몇 개월간의 투병생활은 나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엄마의 식사를 차려드리고, 몸을 씻어드리고, 세탁과 청소를 도와드리고, 틈나는 대로 함께 이야기하며 TV를 봤다. 제일 가까이서 엄마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죄책감 같은 후회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과정 중에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순간마다 사랑을 확인하며 슬픔에 동참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스스로 건방을 떨곤 했다. 물론 감정적인 부분, 자그마한 사건들에 대한 후회가 없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 진심으로 최선을 다 했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정말 후회가 되는 일들이다. 내가 나이 들어 비슷한 상황에 처해보니 이제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작은 행동, 사소한 말 한마디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 모두 후회된다. 비단 부모님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나 사건들에 대해 최선을 다 하지 못했다. 억지로 성실했던 약국 생활을 제외하면 기독교교육학 공부가 그랬고, 연애가 그랬고, 미국으로의 진출이 그랬다. 동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강력한 염원이 없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인연이 없는 사람이나 일이었을 것이라고 변명하곤 하지만 지난 삶의 흔적과 무게가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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