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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해방]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 나와 겨자씨

truehjh 2023. 4. 20. 11:00

나와 겨자씨

 

겨자씨 창립 40주년을 계기로 삼아 겨자씨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내 인생을 회상하며 기록합니다.

 

1. 나

 

우리나라에서는 1955년을 전후해서 가장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이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 역시 그중의 한 아이였습니다. 나는 태어난 지 11개월이 지난 어느 며칠간 고열에 시달린 후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 이후 열악한 시대에 태어난 개인의 비극이며 또한 시대적 비극입니다.

 

나는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장애라는 주제는 나에게 참으로 억울하고 부당한 경험을 이끄는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육제도 안에서 당한 거절 경험이 내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만 여섯 살이 된 다음 달에 논산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종종 오빠 등에 업혀 다니면서 놀림감이 되어야 했고, 다음 해 서울에 이사 와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구락부(?) 초등학교과정에서 한글을 깨치지 못한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과 같이 공부해야 했습니다. 물론 내가 다녀야 하는 학교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선택한 부모님의 배려였습니다. 우리 나이 11살 때 소아마비 수술을 하고 보조기를 착용한 후에서야 비로소, 우여곡절 끝에 제도권 교육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순탄하지 못한 학교생활이었지만 나 스스로 책가방을 들고 독립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밝고 명랑하다는 선생님들의 칭찬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평범한 사춘기 기간을 보냈고, 의사가 되어 나처럼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순진한 꿈을 키우며 공부했고, 드디어 의대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의대는 신체검사에서 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 거절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아주 이른 나이에 장애로 인해 꿈과 미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더라면 의사나 약사나 의상디자이너나 별다름이 없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나의 세상을 통째로 빼앗긴 것 같은 억울함이 왜 그리 컸었을까요. 그 후 장애를 이유로 직업전선에서도 부딪혔고, 사랑과 결혼이라는 삶의 중요한 테마에서도 빗겨나갔습니다. 이렇게 보통사람들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청춘과 장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노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장애를 가지고 살면서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겪었던 장애 차별 경험과 비교하면 별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나의 장애 경험은 불편함이나 부끄러움의 정도를 넘어섭니다. 장애라는 이유로 나의 미래가 거절당했다는 억울함 또는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삶을 이야기할 때 잊혀진, 그리고 잊혀져야만 하는 그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계속 장애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이제는 그만 정리하고 받아들일 때가 지났다는 것을 나도 압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거절의 기억을 어찌하겠습니까.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 동안의 감정 상태이기에 설명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주변의 장애인 친구들은 나의 이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마도 장애를 가지고 살았지만 장애보다 더 크고 절실한 이슈들에 묻힌 삶의 여정이었기 때문에 나의 감정 상태를 의아해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장애 차별 경험으로 청춘을 지나 장년에 이르기까지 암울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나마 이러한 시간을 견디며 살게 해 준 친구들이 바로 겨자씨 친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겨자씨 친구들을 만나 내 모습을 투영하고 좀 더 객관화시키며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의 황금기라는 노년의 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 겨자씨

 

그러면 겨자씨 친구들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일까요. 약대 동기인 한 친구의 꼬드김(?)에 의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약사들의 모임을 만들자는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약사 친구 5명이 모였습니다. 나는 20대 중반의 초보 약사였고, 서울의 주변부 망원동 시장 옆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만난 우리들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장애학생의 자활을 돕는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는 장애인 친구들과 비장애인 친구들이 모여 겨자씨라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겨자씨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오면서 동병상련한 친구들과 함께 의견을 같이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성장발달 과정을 함께하면서 중요한 이슈들을 같이 고민하고, 같이 풀어나갈 수 있어서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거쳐오면서 거리가 멀어진 친구들도 있고,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잊지 않고 겨자씨의 활동을 응원해주시는 남겨진 가족들도 계십니다. 그들이 보여준 우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겨자씨는 나에게 사회적 가족이었습니다. 겨자씨 친구들은 형제자매와 같을 정도의 지지기반이 되어주는 공동체로써 충분한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겨자씨에 오고 간 사람들이 겨자씨라는 무대를 만들고 서로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견고한 울타리를 쳐주었기 때문에 40년을 잘 지냈다고 생각되므로 감사할 뿐입니다. 나의 개인적 욕망으로는 겨자씨가 좀 더 사회적 의식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역량이 부족하거나 관심을 집중할 수 없어서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각자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노후를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바라 마지않습니다.

 

3. 겨자씨에 바람

 

겨자씨 창립 40주년을 준비하면서 '왜 나는 겨자씨를 탈퇴하지 않고 있을까요?'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겨자씨가 40년 가까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40년 동안 겨자씨와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목표가 분명한 모임이라서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말했습니다. 목표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처음에는 경제 상황이 어려운 장애학생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해서 자활을 돕자는 것이었고, 25주년 후에는 다른 장애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한 장애인의 자활을 돕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의견 차이로 트러블도 있고, 작은 감정 전선도 형성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자씨는 그 목표에 다가서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친목 모임이었다면, 그리고 개인적인 모임이었다면 지금까지 참여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겨자씨는 외부로는 장애아동을 돕고 내부로는 서로의 지지자가 되어주므로써 공적인 기능과 사적인 기능이 적절하게 균형을 잡고 있어서, 40년을 기념하는 지금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겨자씨가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기준 없이 사적으로 흘러간다면 존폐 위기에 몰릴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생기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각자가 개인적인 삶에 잘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겨자씨라는 공동체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겨자씨 공동체의 미래에 대하여 결론을 내고 싶어서 종종 조바심을 치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개인 간의 친밀감을 잘 유지하면서 공동체적인 건강함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끝으로, 누구나가 알고 있는 어린 왕자의 명대사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를 인용해 봅니다. 이것이 나에게 겨자씨의 의미입니다. 겨자씨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겨자씨에게 얼마만큼의 사랑과 관심을 붓고 있는가입니다. 다른 어떤 조건들은 불필요한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겨자씨 공동체의 일원이었음이 감사합니다. 겨자씨 모두가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오랜 세월을 함께한 동지로 같이 즐기면서 서로의 노후 삶을 응원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