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남과 망가짐의 차이
영태리로 나오면서 마련한 큰 냉장고가 하나 있다. 처음에는 냉장고가 텅 비어있었다. 어떤 음식이 필요한지, 어떤 음식으로 채워야 하는지를 몰라서였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저런 다양한 음식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 보아 줄만 하다. 커다란 냉장고를 볼 때마다 뿌듯하다. 안 먹어도 배부른 사람처럼 음식에 대한 허기증이 없이 만족하게 살고 있다. 남을 대접할 수준의 식사형태는 아니더라도 내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는 음식의 종류와 양이다. 사랑하는 지인들이 오고가며 가져다 주는 음식도 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는 별로 부족함이 없다. 냉장고 덕분이다.
냉동실은 냉동식품이나 밀키트로 가득 채워져 있고, 내가 만든 음식은 소분된 상태로 잘 정돈되어 있다. 비어있을 때는 음식을 바로바로 찾을 수 있었는데, 가득 채워 놓으니 필요한 것을 찾을 때 불편해졌다. 다 꺼내놓고 다시 넣어야 하는 수고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외식도 거의 없고, 마트도 거의 가지 않는데도, 유효기간을 넘긴 음식을 발견할 때가 있다.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음식은 유효기간을 점검하기가 어려워서다. 이런 현상은 1회 구입량이 나의 평균 소비량보다 훨씬 많아서라는 생각도 한다. 구입과 소비를 균형 있게 조절하는 기술은 아직 터득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나의 문제지 냉장고 문제는 아니어서, 문명의 이기인 냉장고 덕분에 잘 지낼 수 있다고 안심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냉장고에 문제가 생겼다. 야채칸에 넣어 두었던 사과를 꺼내려고 보니 모두가 꽝꽝 얼어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 여기며 며칠을 버텼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일시적이기를 바라는 나의 우매함이었다. 냉장고는 기계이고, 기계가 고장 나면 스스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제로인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도 그냥 시간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하는 수 없이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수리를 요청했다. 경비를 지불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을 왜 그렇게 미루려고 하는지, 전혀 생경한 과정과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왜 그리 큰지, 그 과정과 부딪혀야 하는 시간이 왜 그리 힘겨운지 모르겠다.
고장난 부속 하나 갈아주니 모든 것은 이전처럼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냉장고는 제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오래되지 않은 냉장고여야 가능하다. 오래되지 않은 냉장고가 고장날 때는 조금씩 고쳐가며 사용하면 되지만, 아주 오래된 냉장고라면 고장이 아니라 망가지는 것이어서 이런 과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늙음이라는 것은 고장이 아니라 망가지는 것이다. 즉 노화는 아무리 포장을 잘해서 설명한다 해도 서서히 망가져 가는 것이라는 그 본뜻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몸이 망가지면 다시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젊었을 때와 달리 늙어서는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노화로 인해 망가지는 것은 받아들이겠는데 망가지면서 발생하는 고통이 견뎌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망가져 가는 과정의 고통을 그 어느 때보다도 리얼하게 경험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너무 힘들다. 장애만큼이나 힘든 늙음이라는 망가짐의 과정을 건너뛰고 싶다. 그러나 노화의 길은 모든 생명체가 걸어가는 길이다. 내가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앞서간 모든 생명이 거쳐 간 길이고, 현재 생명을 가지고 있는 그 누구라도 경험해야 하는 길이다. 이 길을 마다할 수는 없다. 그냥 여기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생소하고 두렵고 힘겨운 길이지만, 망가짐의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늙음이라는 변화무쌍한 길을 마지막까지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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