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길 위에서
손에 잡혔던 것들의 형체가 부스러져 내리고, 내 것이라고 했던 것들의 경계가 무너져 버리니, 세상이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늙어가는 길 위에서 보는 풍경이다. 바깥세상뿐 아니라 내 안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해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지 않으니 머릿속에 차고 넘치던 생각들이 사라져간다. 두문불출로 인해 근육량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아무리 집 안에서 운동을 한다고 해도 목표치에 이르지 못하는 양이다. 이렇게 노화를 절감한 것은 지난해가 피크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현상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나의 몸과 생각만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 수리하고 독립생활을 시작한 집안의 시설들도 하나둘씩 노후되어 가고 있다. 5년이 지난 후부터는 더욱 확실하게 노후된 시설들이 드러난다. 반짝반짝하며 깨끗했던 타일들도 빛이 바래서 군데군데 때가 껴있고, 새하얗던 벽지도 누렇게 변색되고 있다. 수도꼭지에서도 가끔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고, 자주 닦아내던 세면대의 물때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조금씩 진해지고 있다. 보일러 스위치의 눈금도 잘 맞지 않고, 화장실 형광등 3개 중의 두 개가 깜빡깜빡하더니 완전히 나갔고, 방의 형광등은 굉장히 밝았는데 그 밝음이 사라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보일러실 벽면이 갈라져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발견했다. 빨리빨리 대책을 세우고 즉시즉시 수리하고 바꿔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다.
주거독립하고 1년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세면대의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곤 했는데 급기야는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스가 막힌 줄 알고 ‘뻥뜷어’를 구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혼자 낑낑대다가 할 수 없어서 하수도 수리하는 사람을 불렀다. 그 사람은 별것도 아닌 문제로 부르는 것이 한심하다는 듯이 1~2분 만에 처리해 주고 출장비와 수리비를 받고 갔다. 가면서 하는 말, 세면대 밑에 있는 호스를 돌려서 빼면 거름망이 있는데 가끔 한 번씩 빼서 청소해 주라는 것이다. 일종의 팁이었다. 1~2년에 한 번은 물 내려가는 호스의 거름망에 걸려있는 머리카락 등의 이물질을 제거해 주어야 한단다. 그 이후로는 물의 흐름이 느려짐이 느껴지면 간단한 청소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집도 아니고, 세면대 사용이 빈번한 것도 아니어서 처음 설치한 그대로 변화하지 않고 있어 줄 것을 기대하지만, 그 기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떨어진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모여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급기야는 막아버리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 때가 끼고 먼지가 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노후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변화다. 전등이건 수도꼭지건 벽지건 간에 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돌보고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늙어가는 나의 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노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단지 병적 현상인 급격한 노쇠로 가지 않도록 노화의 속도를 잘 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처럼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 바로 늙어가는 사람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나 노화와 노쇠의 변화 속도 및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다. 이것이 요즘 내가 맞닥뜨린 심각한 문제다. 예측할 수 없으니 준비할 수 없고, 준비할 수 없으니 몸과 마음이 평정을 유지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늙어가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기는 한데, 그 변화된 상태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망가져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더 힘겹다. 늙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망가짐의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노화하는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은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말했지만, 호기에 찬 그런 용기는 금방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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