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행이야...
“고모... 잘 해... 파이팅...”
걷기 대회(?)에 간다고 인사하며 문을 나서는 나에게 8살짜리 조카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응원해 준 말이다. 사실 걷기 대회라고 말은 했지만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한 모임에서 준비한 작은 행사였다. 보행 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서울숲 공원에 모여 같이 걷기로 한 것이다. 이 행사를 하게 된 이유와 목적 같은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기에는 도토리가 너무 어린 나이인 것 같아 간단하게 걷기 대회라고 이야기해 주었는데, 평소에 잘 걷지 못하는 고모가 걷기 대회에 나간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고모가 꼴등을 할까 봐 정말 걱정이 된 모양이다. 그녀의 응원은 아주 진지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닐 때의 일이다. 입시철이 되면 신문의 첫 장에 불행한 소식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대학입시 거절로 인한 장애학생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러한 사건이 빈번하던 시절에 장애를 가진 학생들의 배울 권리를 주장하던 모임이 있었는데, 치열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장년이 된 이후에 다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유사한 시련을 경험하면서 동시대를 살아온 장애인으로서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던 우리들은 정기모임을 통해 서로의 문제들을 공감하고 공유하기로 했다. 특히 중년을 지나면서 공통으로 겪게 되는 것이 건강의 문제였다.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스포츠시설이나 재활시설이 흔하지 않은 환경에서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재활운동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다. 그중에서 걷기가 가장 적당한 운동으로 떠올랐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개인의 역량에 맞게 걷기의 운동량을 조정하기로 하고, 가끔 모여서 함께 걷는 기회도 갖기로 했다.
그 날의 걷기 모임은 우리끼리라도 모여서 걷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서로 우정을 다지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초지종을 어린 조카에게 다 설명하기가 벅차서, 아이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단어가 대회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걷기 대회라는 말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대회라는 용어는 꼬마 아이의 관심을 유도하기에 충분했고, 또 적중했다. 대회라는 말이 아이에게 주는 이미지는 긴장되는 것이고, 순서를 매기는 것이고, 이겨야 하는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어쩌면 피해 가고 싶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투력이 생기는 단어, 몇 등 안에는 꼭 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단어일 수도 있겠다. 꼬마가 심각하게 걱정하는 반응을 보니 대회라기보다는 모임이 더 적당한 용어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의 선택을 후회해보았자 소득은 없다.
그날 저녁은 내가 늦게 들어왔다. 조카는 궁금증을 안고 잠들었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깨우며 한 말이 ‘고모... 몇 등 했어... 상 받았어?’였으니 말이다. 고모의 걷기 실력 점수가 매겨진 걷기 대회 등수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아침에 깨자마자 내 방으로 달려온 그 아이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저 먼저 앞으로 뛰어가면 빨리 뒤따라오지 못하는 고모를 기다려야 하고, 돌계단을 오를 때면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려서 자신의 작은 손을 내주어야 하고, 그런 모습만 보여주던 고모가 걷기 대회에 나간다고 하니 계산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 아이의 궁금증은 당연하다.
“모두 참가상이야... 몇 등 그런 거 없었어...”
상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몇 번째로 걸었냐고...”
“그냥 10등쯤 했어... 중간이야...”
마땅히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말했는데 중간 정도 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제서 안심을 한 꼬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손을 꼭 잡으며 하는 말.
“휴... 다행이야... 꼴등 하면 우리 고모가 슬프잖아... 10등도 잘한 거야...”
그것도 잘한 거라고 어른인 나를 위로하며 내방을 나가는 조그만 조카아이의 뒷모습이 앙증맞게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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