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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도토리선생님 - 도토리는 누구

truehjh 2006. 5. 9. 21:45

 

도토리는 누구?

 

도토리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그런 애칭으로 불려지는가에 대하여 한 번쯤은 설명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도토리선생님의 두 번째 글을 열어가려고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하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의 가정에는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도토리는 결혼 후 11년 만에 태어난 그 집안의 딸이다. 그 긴 기간 동안 부부의 인내와 노력은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다 알아듣는 듯한 눈망울을 하고 대화에 참여했다. 거의 완벽한 교감을 갖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나는 조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그 아이는 놀랍게도 대답을 한다. 눈을 맞추고는 옹이.. 옹이...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렇지?”하고 물으면 “옹알옹알~”로 답하고, “응!”하고 대답하면 “옹알옹알~”로 반응했다.

 

아빠를 빼어 닮아 이마가 넓고 머리가 크며 눈이 동글동글해서 야물딱진 도토리 같은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나는 그 어린 조카아이를 도토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토리와 도토리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또한 도토리가 등장하는 여러 가지의 그림 동화책을 읽어 주며 도토리에 대한 꿈을 키워주었다. ‘도토리 한 알이 땅 속에 들어가서 싹이 트면 무럭무럭 자라나 아주 커다란 참나무가 된단다. 그리고 많은 도토리 열매를 맺는단다. 참나무는 예쁘고 작은 동물들에게 도토리 양식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여러 동물들이 좋아하는 나무란다. 키가 큰 참나무는 그 아래에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 준단다. 재미있게 놀며 뛰어다니던 동물들이 그늘에 들어와 쉬면서 떨어져 있는 도토리 열매를 먹기도 하고, 먼 여행길에서 지친 사람들이 나무 밑을 지나다가 쉬어 갈 수도 있단다. 너도 아낌없이 주는 도토리나무 같이 멋진 어른으로 자라렴!’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그 아이는 도토리라는 애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세 살 무렵 경주여행을 할 때에 길가에서 주운 도토리 하나를 보여준 적이 있다. 손톱만 한 도토리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으며, 모자 같은 뚜껑을 쓰고 있었다. 아주 작아서 매우 귀여웠다. 조카에게 그것이 도토리라고 일러 주고는 도토리 몇 알을 더 주워서 그녀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서야 주머니 속에 있던 도토리를 꺼내 보게 되었다. 반짝이는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쭈굴쭈굴해진 도토리 껍데기가 손안에 남겨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에 그녀의 얼굴 가득 속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예쁘지도, 귀엽지도, 앙증맞지도 않은 도토리의 실체를 보고 난 후부터 그 아이는 도토리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여느 집 아이들처럼 우리 토끼, 우리 예쁜이, 우리 공주, 우리 똑순이, 우리 강아지 등등의 예쁜 별명을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동물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쉼터를 제공함으로써 도움이 되고 있다는 도토리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나이였다. 나는 대안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예쁜 알밤을 보여주면서 이제 도토리가 아니고 밤토리라고 불러주면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다. 물론 그녀는 도토리보다는 밤토리가 더 좋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아가며 여전히 도토리라는 애칭을 고수하고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가치로 모든 것들을 평가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다. 나 역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주변의 모든 가치들을 판단하는 어린 도토리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야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아름다움과 나눔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나이가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