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Fiction/장년시대(2005~2014)

e갱년기수첩(2) - 노안

truehjh 2008. 8. 29. 12:09

노안


눈에 띄는 갱년기의 증상들을 맞이하기 전에 나에게 제일 먼저 나타난 노화의 신호탄이 바로 노안이다. 바로 몇 개월 전에도 돋보기의 도수를 한 단계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서 새로운 돋보기를 구입하였다. 그랬더니 현재 여섯 개의 안경이 내 주위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하지만 용도가 다 달라서 버릴 수가 없다.


예전에 나는 시력이 좋아서 대중교통 이용 시 곁눈질로도 옆에 앉은 사람이 어떤 내용의 책을 읽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도 잘 들려 가끔 귀가 쫑긋해질 때도 있었다. 일부러 귀담아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주변에서 들려지는 말들을 듣는 것 또한 무료한 시간을 즐기는 방법으로는 꽤 괜찮았다. 그래서 가끔은 곁눈질이나 귀동냥을 통해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환경과 됨됨이를 상상해 보며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곤 하기도 했다. 이것이 나의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면 이상하게 여겨질까.


그러나 이제는 안경을 써도 잘 보이지 않으니 곁눈질도 할 수 없고,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관해서 재빠르게 상상해 볼 수도 없다. 가까이에 있는 글씨들이 잘 안 보이니 당연히 빠르게 눈치를 채는 일이 어려워졌다. 나이가 들면 눈치가 없어진다는 말을 노안이 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가족 중에서 돋보기를 사용하는 분이 할머니 혼자 뿐이셨다. 다른 식구들은 다 눈이 좋아서 안경을 사용하는 식구가 없었고, 따라서 안경이란 것이 그리 익숙한 물건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실한 다리는 제켜놓고, 눈이 좋다는 자랑거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책을 많이 안 읽어서, TV를 많이 안 봐서,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등등의 말로 시력이 좋은 것을 반어법으로 강조하곤 했다. 여행할 때, 렌즈와 세척수를 필수적으로 챙겨야 하는 친구들의 고충이 안쓰럽기는 했어도 나에게 닥친 상황이 아니어서 시력이 약한 친구들의 불편함을 무심하게 넘긴 것 같다.


근데 눈 좋은 사람들이 노안이 빨리 온대나 뭐 그런 말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어머니가 40대 중반도 되기 전부터 돋보기를 착용하기 시작하셨다. 시간이 많이 지나 부모님의 돋보기가 눈에 익숙해져서 거의 의식되지 않을 무렵, 언제부터인가 바로 손위의 오빠가 돋보기를 쓰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집안 연례행사로 형제들이 모이게 될 때마다 안경을 쓴 사람들의 수가 하나씩 늘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형제들은 나이순으로 각자의 돋보기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막내가 돋보기를 쓰고 나타난 날... 오빠가 씁쓸한 웃음을 웃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고 나는 돋보기와 함께 나이 들어감을 또한 늙음을 실감하기 시작했다.